[프린세스], 순정은 죽지 않는다

2015.01.09

요즘 세상에, 공주님 이야기다. 긴 머리카락에 드레스 자락을 나풀거리는 여인들과 긴 칼을 뽑아들어 그들을 지키는 남자들, 정략결혼과 출생의 비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슬픈 사랑의 운명. 캔디 캐릭터도, 신데렐라 스토리도 진부해진 이 마당에 대체 누가 아직도 이런 옛날 옛적 공주님 얘기에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 공주님이 한승원 작가의 [프린세스]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1995년, 순정만화잡지 [이슈]의 창간과 함께 연재를 시작한 [프린세스]는 15세기 무렵 북구의 가상 국가 라미라, 아나토리아, 스가르드를 배경으로 3대에 걸쳐 내려오는 대하 로맨스다. 몇 차례 휴재 끝에 지난해 6월부터 네이버 웹툰에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다시 연재 중이다. 그리고 2015년 1월, [프린세스]는 드디어 지난 연재분 이후의 이야기로 이어질 예정이다. 연재를 시작한 지 20년, 많은 것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중학생 시절 [프린세스]를 보기 시작한 독자들은 이제 삼십 대 중반이 되었다. 80년대 초중반 시작된 한국 순정만화의 짧았던 르네상스는 21세기를 맞이하기 전에 끝났으며, 그 시대를 이끌었던 작가들 중 상당수는 지금 소식조차 듣기 쉽지 않다. 시장도, 독자들의 취향도 크게 바뀌었다. 요일마다 조회수 순으로 정렬되는 네이버 웹툰 순위에서 [프린세스]는 하위권에 속한다. 그러나 지난 11월, 이 작품은 네이버의 유료 콘텐츠 마켓인 N스토어 만화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90년대 순정만화 독자들이 모두 한승원과 [프린세스]의 팬은 아니었을 것이다. 1982년 데뷔한 한승원 작가의 바로 다음 세대이자 ‘4대 작가’로 일컬어졌던 김진, 신일숙, 김혜린, 강경옥 작가는 깊이 있는 심리 묘사, 신화와 역사를 결합한 탄탄한 서사,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캐릭터 등으로 소녀들의 뜨거운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미라 작가의 [인어공주를 위하여]를 비롯한 현대 배경의 학원 순정물이 인기를 끈 데 이어 ‘순정만화 황금기의 마지막 세대’라 불리는 천계영 작가가 [언플러그드 보이]로 신선한 충격을 던진 것은 1996년이었다. 그러나 한승원 작가는 시대와 장르를 떠나 어떤 작품에서든 지극히 고전적인 순정만화의 정서를 유지하는 것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그의 작품들에 대해 “‘사랑의 감정’을 그려내는 것이 목적인 로맨틱 순정만화와 달리 ‘상처받는 감정’을 그려내는 것이 목적인 센티멘털리즘 순정만화에서, 두 주인공은 사랑을 방해하는 거대한 벽에 직면해 고통받고 괴로워하기 위해 그 벽을 돌아가지 않는 맑고 깨끗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누가 캔디를 모함했나])고 분석했다. [프린세스]를 비롯한 한승원 작가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답답해 보일 만큼 속마음을 말로 전하는 대신 말줄임표 가득한 내레이션을 읊곤 하는 것도 그 일환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지향이 독자의 취향을 항상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승원 작가는 2006년 인터뷰에서 “처음 시작했을 때 여주인공 비이는 순종하고 인내하는 전통적인 캐릭터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요즘 독자들은 비이가 소극적 여성상이라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비이를 사랑한다”([화광신문])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프린세스]는 바로 그러한 정서로부터 출발해 통속극으로서 꾸준한 힘을 발휘한다. 왕의 아들과 유모의 딸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천사 같은 심성의 여주인공을 묵묵히 지키는 기사의 순정은 형태를 조금씩 달리할 뿐 드라마에서도 끊임없이 변주되는 소재다. 냉혈한 왕과 적국 출신 천민 여성의 애증 섞인 관계는 할리퀸 로맨스의 전형처럼 보이기도 하고, 세 국가 간의 복잡한 정세에 얽힌 궁중 내 암투는 SBS [상속자들]에 MBC [기황후]를 더하고 연속극의 양념을 첨가한 것 같은 재미를 준다. 또한 한승원 작가의 섬세한 작화는 그 자체만으로 [프린세스]를 보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다. 여섯 살 때부터 종이만 있으면 인형을 그렸고, 별명이 ‘레이스 한’이었을 만큼 레이스와 꽃무늬 패턴을 좋아한다는 그의 취향은 [프린세스]에서 그 정수를 드러낸다. 세 나라의 복식을 각기 다른 국가를 기준으로 참고해 구성한 것은 물론 풍성한 옷 주름과 자잘한 장신구, 궁궐 벽의 태피스트리나 천장의 샹들리에까지 빈틈없이 세밀하게 표현한 작화는 종종 경탄을 자아낼 정도다. 이 집요해 보이는 열정으로 단행본 31권 분량을 내놓는 동안 작가는 몇 번인가 팔이 마비되어 연재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래서 [프린세스]는 만화책에 기름종이를 대고 빛나는 머리카락 한 올, 눈동자의 별 무늬 하나까지 베껴 그리고 싶어 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오랜 시간 따라온 이야기의 행방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여전히 궁금한 작품이다. 90년대 [댕기]와 [윙크]를 돌려 보고 단행본을 차곡차곡 사 모으며 낭만의 세계에 살던 소녀들과 그 세계를 창조했던 작가들은 IMF 이후 출판 만화, 잡지 시장이 무너지며 한동안 멀어졌다. 뛰어난 창작자라 해도 새로운 플랫폼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 신일숙 작가는 웹툰 사이트 레진 코믹스에 [불꽃의 메디아]를, 김혜린 작가는 월간지 [보고]에 [광야]를 연재 중이다. 최근 네이버 웹툰에서 시작된 ‘한국만화거장전: 순정만화 특집’에는 한혜연, 오경아 작가가 차례로 단편을 내놓았다. 그러니, 아직은 순정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한승원 작가가 네이버에 연재를 재개하며 “어렸던 주인공들이 자라나고, 같이 자란 독자들이 어른이 되고, 어머니가 되고, 작가는 그 모두와 프린세스의 세계에서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한때 소녀였던 여성들의 마음속 어딘가엔 그 세계를 떠나고 싶지 않은 소녀가 살아 있기 때문에.

글. 최지은
자문. 만화가 오경아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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