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웹툰 작가들의 필명

2014.11.27
내 이름이 인터넷에서는 다른 의미로 흔히 사용되곤 하지만, 나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웹툰작가들 중에는 필명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배우나 가수들의 경우 이름이 지나치게 흔해서 자기 이미지에 맞게 예명을 짓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문득 동료들은 어떻게 필명을 짓게 되었을지 궁금해져서 여기저기 물어본 적이 있다.

<평범한 8반>의 영파카 작가님은 단순히 자신의 얼굴이 알파카를 닮았다는 이유로 필명을 영파카로 정했다고 한다. (‘영’은 본명에서 따온 글자) 이렇게 별다른 뜻 없이 정한 필명이 의외로 많았다. <죽음에 관하여>의 작가 중 시니 작가는 본명이 신희라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정한 필명이었다가, 나중에 일본어로 죽음이 ‘시니’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그린 만화와 연관 지어 사후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한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지어진 필명도 있다. <싸우자 귀신아>의 임인스 작가의 경우 과거 인터넷을 시작할 때 아이디를 정하면서 본명인 ‘임만섭’의 약자로 ‘LMS’을 쓰려 했는데 실수로 M을 N으로 쳤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서 사람들이 L의 소문자인 ‘l’을 I로 오인하여 INS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물론 명확한 목적을 갖고 의미를 부여해서 만든 필명도 많이 있다. <네로의 실험실>의 스토리를 맡고 있는 외눈박이 작가의 경우 신화 속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에서 따온 필명으로 무려 ‘닿을 수 없는 이상을 쫓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중2 때 판타지 소설로 데뷔하며 지은 필명이라 늘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바꿀 마음이 없다고. 그리고 <선천적 얼간이들>로 유명한 가스파드 작가의 경우 의미보다는 발음했을 때의 소리의 느낌과 이미지를 중시해서 고심 끝에 만든 필명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작가들이 예전에 지은 필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는 조금 놀라웠다. <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을 연재했던 이현민 작가의 경우 원래 ‘몰락인생’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었다. 이 필명은 일본 만화 <바람의 검심>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도시 낙인촌 사람들이 쓰는 필살기 이름이었는데, 어느 날 동료 작가의 어시스턴트에게 사인을 해주다가 ‘데뷔 기원합니다. 몰락인생’이라고 쓰고는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본명으로 바꿨다고 한다. <장미아파트 공경비>의 박병규 작가 역시 아마추어 시절 사용하던 ‘삼류쿤’이라는 필명 때문에 삼류가 될까봐 데뷔하면서 바꾼 케이스이고, 친한 동료 작가 전진석의 경우 아마추어 때 쓰던 ‘유성우’라는 필명이 오그라들어 나중에 본명으로 바꿨다고 한다.

필명 같지만 사실 본명인 경우도 있다. 유명 야구선수 이름이 본명인 나도 여기에 속하며 <가우스 전자>의 곽백수 형님 역시 본명이다. <용이 산다>의 초 작가 역시 본명은 정 솔이지만 원래 진짜 본명은 ‘정 초’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지어주셨다가 정월 초하루 같아서 정 솔로 이름을 바꿨는데 나이가 들고 나서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원래 갖고 있던 ‘정 초’라는 이름을 발견, 필명으로 쓰는 중이다. <페이머스맨>의 유비 작가도 알고 보면 자신의 본명이다. 나도 그렇지만, 자기 필명이나 이름 때문에 스스로를 검색하기가 쉽지 않은 작가들도 많이 있다. <폭풍의 전학생>의 강냉이 작가는 자기 필명을 검색하면 뻥튀기만 나온다. 강냉이 작가는 본명도 ‘오 똑’이라서 어느 쪽을 쓰건 필명 같았을 텐데. 정 반대의 경우도 있다. 대중에게 드러나길 원치 않은 작가들의 경우 아주 흔한 이름을 필명으로 써서 검색에 걸리지 않도록 숨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런 작가들의 예는 들지 못하지만 나에겐 신선한 이야기였다.

김춘수의 <꽃>이나 지브리 스튜디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봐도 느끼게 되지만, 이름과 호칭은 아주 큰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정한 필명이나 예명은 그만큼 아주 명확한 독립의 의지가 아닌가 싶다. 그 것에 직접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레사>를 그리는 포고 작가는 마릴린 맨슨의 키보디스트가 한 파란 모히칸 머리가 너무 멋져서 그의 별명인 ‘포고’를 필명으로 따 왔으나 훗날 그것이 살인마의 별명이었다는 것을 알고 기분이 나빠졌다고 했다. 하지만 필명을 버리는 대신, 자신이 멋진 삶을 살아 거꾸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 되니까, 라고 생각했다는데 역시 이런 것이 ‘내가 누구냐’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했다.

나도 데뷔를 준비하던 시절, 남이 준 이름이 아닌 내가 정한 이름으로 활동하고 싶은 마음에 필명을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전에 너의 본명이 갖고 있는 의미는 잘 알고 있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한 방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이름의 의미조차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으면서 무조건 내가 정한 이름을 바랐다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워져서, 결국은 본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때 정하려 했던 필명을 여기에 쓰면 흑역사를 하나 셀프 추가하는 것 같아서 쓰진 못하겠지만.

이종범
<닥터 프로스트> 작가로 일 벌이길 좋아하는 참치형 만화가.
덕력과 잉여력의 위대함을 신봉하지만 정작 본인은 마감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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