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승리와 패배

2014.11.13

* 11월 12일자 tvN <더 지니어스 3>를 아직 안 보신 분에게는 스포일러가 되는 글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승부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지낸다. 명확하게 승리와 패배가 갈라지는 상황을 일상 속에서 겪을 일이 있을까.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승패의 명암이 명확히 갈리는 스포츠의 세계나 게임의 세계에 매료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씨름부와 육상부를 거쳐 늘 승부를 경험하던 스포츠 소년 시절엔 승부라는 개념이 나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러다가 무리한 운동으로 인한 마찰성 관절염 때문에 닥터 스톱이 걸리는 바람에 거의 15년 가까이 스포츠의 세계를 떠나 살아왔다. 즉, 나에게는 최근의 <더 지니어스: 블랙 가넷>(이하 <더 지니어스 3>) 생활이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농도 짙은 승부의 세계였던 셈이다.

승부 없는 삶을 너무 오래 살아왔기 때문일까, <더 지니어스 3> 1화 촬영이 시작되는 순간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 안의 호승심이 모두 사라진 듯한 느낌. 난감했다. 승부를 펼치라고 섭외된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러면 곤란한데.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야, 낮은 호승심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수도 있겠지만, <더 지니어스> 세트장 안에서만큼은 최악의 덕목이 아닌가. 그렇게 ‘중간 달리기’를 하듯 몇 주를 촬영했다.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그냥 본능대로 묻어갔다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6회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데스매치에 가게 되었다. 명확하게 승리와 패배가 갈라지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 승리했다. (정훈이 형 미안해!!) 정말 간만에 느끼는 아드레날린 폭탄이었다. 그리고 바로 1주일 후 정 반대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사실 <더 지니어스 3>의 데스매치 중에서 내가 가장 자신 있었던 게임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흑과 백2’(이 게임은 (최)연승이가 강용석 변호사님과 플레이하게 되었을 때 나의 노하우를 전부 알려줘 버렸다), 두 번째가 ‘베팅 가위바위보’였다. 그런데, (김)정훈이 형과 일대일로 붙은 순간 이 게임이 나왔다. 덕분에 보다 침착할 수 있었고 거기에 조금의 운이 더해져 한 화를 더 생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 내가 가장 자신 없어 하는 게임은 ‘본격 수읽기’에 해당하는 게임들, 이를테면 체스나 장기와 같은 게임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현민이와 마주 선 순간 내가 해야 할 승부가 바로 그런 게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민이는 여러 가지 게임에 모두 능한 진정한 지니어스 중 한 명이지만 그 중에서도 수읽기를 정말 잘 한다. 바둑 3단답게 수십 수백 개의 수를 모두 읽어가며 플레이하는 친구다. 즉, 1주일 전 나의 게임으로 승부한 내가 이번에는 상대방의 게임으로 승부를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운동 경기에서 지면 다음 시합을 생각하며 질 수도 있지 뭘, 이라는 말로 나 자신을 속이곤 했으나 사실은 엄청나게 분했다. 반대로 이긴 날에는 아드레날린의 잔여물 속에서 헤엄치며 사지를 버둥거리고 기뻐하기도 했다. 그 시절 나에게 가장 웃긴 말은 ‘우리 모두가 승자’라는 말이었다. 그게 말이 되나. 내가 이겼으면, 쟤는 진 거지. 혹은 그 반대이거나.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음악도 해 보고 만화도 그리다 보니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순위에서 졌지만 수익에서 이기는 만화를 보기도 하고, 댓글수가 더 적은 만화가 훨씬 열렬한 추종독자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승부는, 사실 대부분의 승부는 2차원이 아닌 3차원의 세계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열 명이 하나의 게임으로 승부를 가리면 1등은 한 명뿐이다. 하지만 10명 각자가 자기 게임을 하면 어쩌면 열 명의 1등이 나올 수도 있다. 나는 이 사실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음악의 세계에서도, 만화의 세계에서도 저마다 각 분야의 1등이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이 사실을 체화시키기 전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이 한 가지 기준으로 다른 작가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지는 것도 많이 목격했다. 나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명료한 패배의 순간을 한 번 짚으면서 재고하게 만들다니. <더 지니어스>란 프로그램은 참 시니컬하고 재수 없는 주제에 중요한 순간에 적절한 대사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그런 멘토 같기도 하다.

이종범
<닥터 프로스트> 작가로 일 벌이길 좋아하는 참치형 만화가.
덕력과 잉여력의 위대함을 신봉하지만 정작 본인은 마감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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