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첵>, 사라져버린 고전의 미 ★★★

2014.11.06
독일의 희곡 <보이첵>은 어떤 장소든,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적어도 한 해 한 작품씩 꼭 공연된다. 희곡이 미완성이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879년, 그러니까 135년 전에 쓰인 이야기가 마치 어제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이야기인 마냥 익숙하기 때문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매일 완두콩만 먹는 생체실험에 가담해야 하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가진 자들 밑에서 일해야 한다. 갖은 괄시와 치욕 속에서도 참아야 살 수 있다. 소변 하나도 실험 때문에 통제당하는 삶.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없는 인생. 계급에 대한 날 선 비판과 본능에 대한 고민이 담긴 묵직한 이야기가 영국 웨스트엔드와의 합작 끝에 올가을 뮤지컬로 탈바꿈되어 공연 중이다. <명성황후>, <영웅> 등 한국적 소재로 무대를 지키던 윤호진 연출의 작품이라 더욱 놀랍다. 그는 왜 많은 희곡 중에서 <보이첵>을 선택했을까.



<보이첵>
창작 초연│2014.10.09.~11.08.│LG아트센터
원작: 게오르그 뷔히너│연출: 윤호진│작곡 및 대본: 싱잉 로인스│주요 배우: 김수용·김다현(보이첵), 김소향(마리), 김법래(군악대장)
줄거리: 사랑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생체실험까지 감당했던 순수한 남자의 파멸기


[한눈에 본 뮤지컬]
지혜원: ★★★ 보편타당한 정서를 겨냥하기엔 조각이 부족한 미완의 퍼즐

<보이첵>은 135년 전에 쓰인 희곡이지만, 부조리한 사회에서 한 인간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기 때문에 지금 시대에도(혹은 지금 시대이기에 더)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뮤지컬 <보이첵> 1막에서도 생체실험과 애인의 외도 등 보이첵을 궁지로 몰아넣는 사건이 주로 발생하고, 그에게 억압을 가하는 인물들인 중대장, 군악대장, 의사는 권력을 대변한다. 원작과 동일한 조건에서 시작하지만, 뮤지컬에서는 보이첵이 처한 사회적 상황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거나 진지하게 그려지지 않아 2막에서 애인을 살해한 그의 행동은 사랑의 배신과 가정파탄에 의한 분노로 보이는 데 그친다. 확장성을 가진 텍스트인데 이야기의 폭이 좁아져 버렸다. 보이첵은 권력자들의 세상에서 시달리고 끝내 비극으로 치닫는 인물이기 때문에 모든 행위의 당위성은 결국 주변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이 사람이 왜 파멸해가는가에 대한 단편적인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은 조각들이 부족하다. 게다가 그마저도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장경진: ★★★ 사라져버린 고전의 미
현재 공개된 버전으로 봤을 때, 윤호진 연출이 뮤지컬 <보이첵>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명확해 보인다. 인간의 순수와 사랑의 위대함. 집시들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어쿠스틱한 느낌의 음악(영국 버전)은 한국 공연에서는 현악기가 중심이 된 편곡으로 좀 더 드라마틱하게 구현됐고, 갈대숲 무대는 황량함이라는 감정을 관객에게 심는다. 그 자체로 나쁜 선택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주제를 가져온 원텍스트가 <보이첵>이라는 점에 있다. <보이첵>은 계급사회에 대한 함의를 더 짙게 품고 있고 순수보다는 오히려 본능에 집중한 텍스트지만, 뮤지컬 <보이첵>의 방향성을 ‘러브스토리’로 잡은 이상 계급과 본능에 대한 질문은 무대 한켠으로 비켜났다. 윤호진 연출은 <명성황후>, <영웅>의 해외 공연을 통해 그 한계를 넘기 위한 글로벌한 프로젝트로 ‘사랑’을 선택한 셈이다. 그런데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이를 죽인 이야기’와 ‘인간으로서의 삶을 빼앗긴 이의 분노’ 중 무엇이 더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멜로드라마가 쉬울 수 있다. 하지만 후자가 전제되었을 때 비로소 전자가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건 아닐까.


[더 넓은 눈으로 본 뮤지컬]
장경진: 가부장적인 시각에 갇힌 여성 캐릭터

연극이 뮤지컬로 바뀌면서 가장 많이 변한 캐릭터는 역시 보이첵의 애인인 마리다. 1막에서는 꾸준히 “창녀”, “걸레”라는 대사로 마리를 규정짓고 권력과 부를 지닌 군악대장과의 외도를 통해 본능에 충실한 여자로 그려내지만, 2막에서는 어느 순간 회개한 성녀가 되어 그동안 저지른 일에 대해 후회한다. 물론 원작의 마리에게 죄책감이 없을 리 없고, 마리의 행동이 가난한 현실에서 택할 수 있는 선택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터미션 20분 사이에 급격하게 변화한 마리를 이해하기에는 사회적 배경과 동기가 흐릿하다. 마리가 결국 전형적 여성이 됨으로써 이야기는 소재에 비해 뻔한 길로 흐르고, 결론부에 등장해 그들을 위로하는 나이 지긋한 여성 캐릭터는 기존 윤호진 연출의 스타일과 다르지 않다. 여성을 순종적인 구원의 존재로 바라보는 이러한 그의 시각은 오히려 캐릭터의 확장을 막고 더 많은 가능성을 방해하는 듯해 안타깝다.

지혜원: 해외와의 협업 시 주의해야 할 점
이번 <보이첵>은 한국과 영국에서 함께 기획했고 적절한 파트너를 찾아 8년간 개발을 해왔다는 점에서 기존 해외 작업에서 진일보했다. 좀 더 본격적인 협업의 과정이지만, 특히 음악 파트에 해외 크리에이터가 참여한 경우, 개발 단계에서의 한국어 공연은 딱히 이점을 찾기 어렵다. 게다가 영국에서와 달리 국내에서는 대극장 무대에 오르느라 재편곡이 필요했다. 뮤지컬에서의 음악은 스토리텔링만이 아니라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감정을 효과적으로 구현해내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멜로디와 가사가 함께 기능함으로써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작곡과 작사의 과정은 유기적이어야 한다. 글로벌한 테마를 정서적으로 공유했다고 해도 언어적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해외 작곡가의 의도를 한국어 가사로 제대로 살리기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심지어 지금의 가사는 너무 설명적이다. 연극이 아닌 뮤지컬 <보이첵>의 당위성과 매력이 더 필요하다. 차라리 영어로 공연하고 자막을 준비하는 게 해외 합작이라는 브랜드를 공고히 하고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개발 중이라는 점도 더 와 닿지 않았을까. 뮤지컬 <보이첵>은 다음 스텝을 위해 텍스트의 방향성을 다잡는 게 가장 먼저 필요할 것 같지만.

사진 제공. LG아트센터│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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