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① 삶의 가장 비루하고 아름다운 순간

2014.11.04

더 열심히 했다면 자신의 세계를 지킬 수 있었을까. tvN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임시완)는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의 바둑 엘리트지만 결국 프로에 입단하지 못해 스물여섯의 나이에 인맥을 통해 대형 상사의 인턴이 된다. 십수 년의 세월을 바둑에 바쳤지만, 전혀 상관없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건 지금 이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하여 요령 없이 그저 열심히 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계속 열심히 하라”는 동료 인턴의 비꼬는 말에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아니,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에 나온 거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뿐이다.’ 수많은 노력을 했던 과거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지금 이곳에서, 그럼에도 지금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더 노력하고 더 잘할 수 있다고 되뇌는 수밖에 없다. 드라마 <미생>은 그렇게 견뎌내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동명 원작 만화의 거의 모든 설정과 캐릭터, 플롯을 가져온 이 작품이 원작과는 다른 결을 보여주는 건 이 지점이다. 원작이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 그리고 그들의 회사인 원 인터내셔널을 통해 회사원들이 힘낼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득 담아냈다면, 드라마 <미생>은 정글 같은 회사를 통해 장그래의 막막함과 두려움을 강조한다. 원작에서 장그래의 통찰력을 높이 사던 오상식 과장(이성민)은 낙하산으로 들어온 장그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인턴 동기 장백기(강하늘)는 젠틀한 미소 뒤에 장그래의 부족한 배경에 대한 의구심을 감춘다. 누구 하나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새로운 바둑판 위에서 장그래는 더더욱 조심스럽게 돌을 놓을 수밖에 없다. 때론 자신을 오해한 상사에게 사무실에서 나가라는 고성을 들으며, 때론 자신을 따돌린 동기들 때문에 혼자 남아 꼴뚜기젓을 휘저으며. 원작에서도 장그래는 아직 온전히 집을 짓지 못한 돌 네 개짜리 ‘미생’이지만, 유독 드라마의 그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해 보인다. 나머지 귀퉁이를 메워 ‘완생’이 되길 바라지만, 그동안 상대는,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완생’은커녕 당장 무너져 죽은 돌이 될지 모를 두려움. ‘미생’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드라마는 원작에서 장그래의 승부사 본능과 통찰력이 돋보였던 프레젠테이션 준비 에피소드에서조차 장그래의 장점은 줄이고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파트너인 한석율(변요한)의 오만방자함을 받아주는 모습을 새로 추가했다. 결코 통쾌하진 않지만 덕분에 프레젠테이션에서 살아남아 계약직 신입사원이 될 수 있다. 또한 장그래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오 과장 역시 김동식 대리(김대명)의 구제를 위해 평소 껄끄럽던 최 전무(이경영)에게 고개를 숙인다. 자존심은 구겼지만 팀원은 지켜냈다. 개인의 권한과 책임이 조직 시스템 안에 명확히 정립된 회사라는 판 위에서 돌 하나로 판세를 뒤바꾸는 신묘한 수란 존재하기 어렵다. 대신 아직 온전하게 짓지 못한 집이나마 지켜내고 다음 수를 위해 인내할 뿐이다. 드라마 <미생>은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수의 의미를 더 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유예된 패배가 아니다. 내일이란, 오늘을 견뎌낸 자의 전리품이다.


그래서 드라마 <미생>은 아주 느릿한 속도의 성장물이다. 고졸 검정고시 출신의 장그래가 학벌과 스펙으로 무장한 동기들을 제치고 단 다섯 명인 신입사원에 뽑히지만, 드라마는 그의 괄목상대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그 하루하루 견뎌내는 시간을 통해, 얼핏 비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과정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을 넘어서는 것뿐이다. 앞서 말했듯, 세상은 ‘완생’이 될 때까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생’의 형태로 시작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성장은 생존을 통해서만 담보할 수 있다. 우선은 버텨보라는 오 과장의 조언처럼. 견뎌내는 모든 시간이 성장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견뎌내지 않고 성장하는 방법은 없다.

이 작품이 윤태호 작가의 <미생>을 잘 살린 2차 창작물이지만 또한 연출을 맡은 김원석 감독의 <미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에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신인연출상을 안겨줬던 KBS <성균관 스캔들>, 그리고 CJ E&M으로 둥지를 옮겨 만든 Mnet <몬스타>는 모두 유예된 시간을 사는 청춘들의 성장 이야기다. 학문과 인격을 닦는 것이 동일시되는 성균관의 이념 안에서 잘금 4인방은 자신들의 신념을 키워나가며, 민세이(하연수)를 비롯한 북촌고의 청춘들은 많은 것을 바꾸진 못할지언정 노래를 통해 자신과 서로를 위로해준다. 이 빛나는 순간들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미숙한 청춘들이 자신들의 꿈과 재능, 의지를 다지는 인큐베이터로서의 성균관과 학교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유예의 시간 없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세상에 내던져진 청춘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 <미생>은 말하자면, 오랜 시간 청춘의 성장 서사에 천착해온 창작자가 이 질문에 대해 내놓은 성실한 답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미생>은 샐러리맨뿐 아니라 다른 모든 보통 사람들을 위한 값싸지 않은 위로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라는 무책임한 희망가는 여기에 없다. 사실 장그래는 충분히 열심히 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바둑 공부를 할 수 있을 만큼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일과 바둑을 병행하며 프로가 될 만큼의 기재는 아니라서 자신의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밑천이라고는 노력밖에 없는 그에게, 노력은 이미 충분히 했다는 말은 이제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거짓 고백을 해야 한다. <미생>은 그것이 거짓이라 꾸짖기보다는, 그렇게 해서라도 삶의 무게를 감당해내는 모든 모습을 긍정한다. 지금 이 순간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이렇게 쌓인 하루하루가 우리를 성장시킬지 모른다고. 동기들의 비웃음을 뒤로한 채 처연하되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회사로 돌아가는 장그래의 모습처럼, 삶의 가장 비루한 순간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그래, 그래, 그래.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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