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로>, 미성숙한 남자의 ‘웃픈’ 전사

2014.10.31

남자1호 노노미야. 대학 지하실에 틀어박혀 광선의 압력을 연구하는 물리학자. ‘계산이 번거롭지만 책임이 없어 유쾌한’ 세계에 몰두하느라 속세엔 무관심하다. 남자2호 히로타 선생. 러일전쟁 승리에 도취된 일본을 가리켜 “망하겠지”라 내뱉는 그는, 비록 야심 없는 교사이지만 태도나 비평이 범상치 않은 ‘위대한 어둠’이다. 남자3호 요지로는 그 ‘위대한 어둠’을 입신양명시키기 위해 지면을 낭비하는 허풍쟁이이자,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젊은이다. 그가 납뜩이라면 그에게 운명을 맡겨버린 가련한 이제훈이 있어야 할 텐데, 갓 도쿄제국대학의 문을 통과한 구마모토 촌놈이자 싱숭생숭한 청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남자4호 산시로가 바로 그이다.

남자4호에겐 여자 넷이 있다. 어머니의 편지로만 등장하는 고향 세계의 오미쓰, 상경 열차에서 “번개” 같이 스친 여인, 노노미야의 다정한 누이 요시코, 그리고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도회의 여자 미네코다. 히로타 선생은 그녀 역시 자의식이 지나치게 큰 요즘 청년이라 유형화하지만, 산시로에게는 첫 만남부터 풀리지 않는 두려움과 모순의 총체다. 아름답지만 나를 업신여기는 것 같고, 떠나온 고향의 세계나 “그 공기를 거의 알 수 있는” 학문의 세계와는 다른, “전등이” “은수저가” “환성이” 있는 가장 의미심장한 세계에 속해 있는 것 같다. 중반쯤 미네코는 ‘스트레이 십’이란 말을 가르쳐주는데, 번역하지 않은 채 쓰이는 이 말처럼 둘 사이의 감정도 사랑이라 번역되기 이전의 세계다. 그리고 허무하게도,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는 ‘스트레이 십’이 되뇌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밀당’도 ‘썸’도 아니고 양 타령에서 끝이다.

근대 문학 연구자들의 진지한 논의 대상인 대문호 소세키의 <산시로>를 ‘짝’ 풍으로 소개하다니 왠지 스스로가 경박해진 느낌이지만, 수백 가지의 깊이 있는 독해가 있는 만큼 한 번쯤 용서받길 바란다. 무엇보다 산시로와 동갑(23세)이던 첫 독서 땐 알지 못했지만 이른바 결혼 적령기에 재독하니 미네코에 감정이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 주위엔 현실이 염증 나 현실감각을 갖지 않기로 선택한, 애나 어른이나 복장 터지는 미성숙한 먹물들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녀와 결혼한 남자의 정체는 끝내 흐릿하지만, 남자1~4호처럼 배짱보다 서재가 두터운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 믿는다.

또한 기실 연애야말로 자아가 비대해져버린 근대인의 긴급한 문제이자, 뒤틀린 세계를 어깨에 지면서도 손을 쓰지 않았던 소세키 지식인 군상의 가장 선명한 불안 그 자체다. 소설 초반, 아직 도쿄에 적응하지 못한 산시로가 전차에 치어 죽은 시체를 보고 뜬금없이 ‘비평가가 되어볼까’란 생각으로 비약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비평가는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방관하고 있는 사람”이란 의미로 쓰이는데, 결국 이것은 미네코와의 관계의 종점은 물론 <산시로> 이후의 산시로마저 암시한다. 생기 넘치는 난제인 미네코도 ‘현실 세계’도, 무방비의 촌놈 앞에 던져진 시체와 마찬가지로 다스려지지 않는 불안과 위험의 총체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산시로(들)’이 결국 세계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알고 있다. <그 후>와 <마음>으로 이어지는 고등유민의 침울하기 그지없는 번뇌와 말로를 알고 있고, 갈수록 심해졌던 소세키의 신경쇠약도 알고 있다. 그러니 <산시로>의 어찌할 수 없는 밝은 분위기가 골계를 넘어 애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직’이라는 시간의 부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곧 점점 더 깊어질 어둠을 알고 있을 때 석양은 눈부신 동시에 처연하다.

그러나 <산시로>를 어떻게 음미하든 실질적인 연애 문제에 있어선 반면교사로 삼도록 하자. 구름을 보며 ‘타조의 목 깃털 같다’고 말하는 미네코에게 구름 형성의 과학적 배경(노노미야에게서 주워들은)으로 받아친다거나, 농담에 더 근사하게 대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답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입을 딱 닫아버리는 그 무구함을 말이다. 그 외에도 웃긴 장면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맘껏 웃되 176쪽의 주석을 기억하자. “Quid rides? 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ratur(뭘 웃나? 이름만 바꾸면 자네 얘긴데.)” 하기야 요지로의 말대로 스무 살 전후의 동갑 남녀인 것이 문제인 지도 모른다. “모든 면에서 여자가 한 수 위 아닌가? … 앞으로 5, 6년은 지나야 그 잘난 정도가 그 여자의 눈에 들 거네.” 이것이 백 년 전 이야기란 말인가요, 소세키 선생!

안은별 (전 <프레시안> 기자)
탈락한 입사 지원서가 ‘패자 부활’하여 기자가 되었고, 사표가 반려되어 특수 부서로 배속된 결과 4년간 북 리뷰 섹션을 만들면서 책 세계와 연을 맺었다. 현재 다른 길을 도모하면서도, 꾸준히 책을 읽거나 쓰고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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