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인과 <조선>, 이토록 후안무치한 세상

2014.10.30

이것은 완벽한 제목이다. Joyride: 폭주 드라이브. 이보다 더 윤서인 작가의 만화 <조이라이드>의 최근 행보를 잘 설명해주는 단어가 있을까. 야후코리아, <한국경제> 등을 거쳐 연재되다가 최근 <조선일보>의 프리미엄 뉴스 서비스 <프리미엄 조선>에 입성한 <조이라이드>(이하, 이전의 타 매체 연재분과 구분하기 위해 <프리미엄 조선> 연재분은 <朝이라이드>로 표기)는 첫 화부터 ‘촛불’로 상징되는 진보 대중을 비판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물론 진보 대중을 비판했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폭주라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비슷한 정치 성향과 논리를 가진 매체의 권위와 타깃 독자층의 성원에 힘입은 이 작가가 최소한의 성찰이라는 브레이크 없이 자신의 반대편에 선 이들을 향해 무지와 악의로 가득한 공격을 퍼붓는다는 것이다.

<朝이라이드> 1화에서 작가는 다양한 예를 들어 진보 대중의 이중성을 비판한다. 하지만 그가 이중적이라 언급한 것들은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아니다. 그는 대형 참사에 대해 대통령의 책임을 촉구하는 것과 대통령을 국민 중 한 명일 뿐이라 말하는 것이 대통령의 지위에 대한 이중적 태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행정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은 국정 전반에 대한 큰 책임을 지고 그만큼의 권력을 행사하되 민주사회의 합의를 넘어서는 특권을 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건 헌법에 규정된 것이다. 또한 세월호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면서 모바일 메신저를 압수 수색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 역시 이중적이라 비판하지만, 세월호 유가족이 원하는 기소권은 권력의 외압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권한인 반면, 유언비어를 막겠다며 국가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모니터하는 건 권력의 적극적인 개입이자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맥락은 쏙 빠져 있다.

이처럼 해당 사안들에 대한 맥락을 지우고 자기가 원하는 프레임으로 재구성하는 건 윤서인의 못된 습관이다. 지난 3월 함익병 씨의 박정희 옹호를 소재로 한 <조이라이드>에서는, 박정희를 욕하는 연예인은 개념인 취급을 받고 박정희를 좋게 말하는 사람은 방송에서 퇴출되는 건 표현의 자유에 어긋난다는 식으로 억울한 듯 말했다. 함익병 건의 문제는 박정희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가 아닌 독재 시스템에 대한 미화라는 간단한 맥락적 이해도, 독재 시스템 안에서는 과거 박정희 통치 시절 그러했듯 표현의 자유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는 최소한의 역사적 인식도 여기엔 결여되어 있다. 오직, 진보 세력이 하는 건 괜찮고 그 반대편은 안 되는 건 역차별 아니냐는 억울함과 피해의식만이 그의 만화 전반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사안을 단순화해서 왜곡하고 그 왜곡된 프레임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방식은, 바로 그 이유로 특정 세력 혹은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매체의 입맛에 잘 들어맞는다. 자유시장경제의 수호자(<한국경제> 창간 50주년 자체 기사에서 인용)를 자처하는 매체인 <한국경제> 연재 당시, 그는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 논리들을 공공의 적처럼 프레이밍하고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만화를 선보였다. 가령 한국의 의료복지를 찬양하면서 의료 서비스와 경제는 불가분 관계이기 때문에 ‘돈보다 생명’을 외치는 의료 영리화 반대자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식이다. 하지만 한국이 경제 수준에 비해 비교적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건 비영리병원이 수익을 병원시설과 인력에만 재투자할 수 있는 현재의 제도 덕분이다. 즉 윤서인은 시장논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기에 가능한 한국의 높은 의료복지를 찬양하면서 시장논리 역시 옹호하느라 바로 그 의료복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성숙한 시민들을 의료복지의 무임승차자로 왜곡하는 무리수를 감행한다. 논리적으로는 파탄에 가깝지만, 기본적으로 무임승차를 혐오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식의 공격은 생각보다 효과적이다. 알고 한다면 악의적이고, 모르고 한다면 무지하고 악의적인 것이다.

그래서 <프리미엄 조선>과 윤서인의 만남은 일종의 포르노다. 서로의 욕망을 부끄러움 없이 알몸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朝이라이드> 프롤로그에서 윤서인은 기득권에 맞서는 저항의 목소리가 오히려 이젠 더 무서운 기득권이 됐으며, 자신은 이제 그 반대편에서 ‘우리 사회의 조용하고 상식적인 다수’를 위해 만화를 그리겠노라 천명한다. 전형적인 보수 매체의 논리다. 세상은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 덕에 잘 돌아가고 있으니 현재의 시스템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논리. 얼핏 그럴듯하지만, 바로 그 자기 자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부당 해고 노동자들을 외면하기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다 인격적 모독을 당한 경비 노동자의 자살 기도를 외면하기에 가능한 말이다. 물론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보수 매체는 지금까지 이러한 허점을 좀 더 교묘하게 가려왔다. 그보다 훨씬 거칠고 노골적인 윤서인의 발탁은 이러한 최소한의 위장조차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윤서인 역시 대표적 보수 매체의 권위에 기대 그 어느 때보다 진보 대중에 대한 악의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앞서 말한 <朝이라이드> 1화가 부당한 저울질로 진보 대중을 비난했다면, 2화에선 안전을 위해선 노란 리본 백 개보다 노란 깜빡이 한 번이 중요하다는 말로 마치 노란 리본 단 이들이 기본 안전을 더 지키지 않는 것처럼 왜곡했다.

과연 이 당당함은 자신감의 발로일까,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보수의 패악일까. 알 수 없지만, 이 폭주는 노골적이고 당당하기에 추하고 민망하다. 때문에 우리가 정말 힘겹게 감당해내야 할 건 <朝이라이드>의 내용이 아닐지 모른다. 이런 폭주의 당사자가 유력 매체의 힘을 빌려 보수라는 가치를 표방하는 수많은 이들을 대변하게 됐다는 것, 그 지면을 통해 스스로를 ‘앞으로도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상식적인 만화들을 쭉 그려낼 예정’(<朝이라이드> 작가 프로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주 봐야 할 야만의 민얼굴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이런 후안무치한 세상을 살고 있다.

교정. 김영진




목록

SPECIAL

image 장성규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