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지 “공연에서 <에반게리온>의 곡들을 연주하겠다”

2014.10.08
고상지의 첫 앨범 < Maycgre 1.0 >은 애니메이션이나 캐릭터에 영감을 받은 곡들로 채워졌다. 앨범명부터 <에반게리온>의 마리, 아스카, 그리고 레이, <천원돌파 그렌라간>의 요코, <슈타인즈게이트>의 크리스, <베르세르크>의 그리피스, <강철의 연금술사>의 엔비의 이니셜을 따서 조합했다.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는 탱고 음악인데, <에반게리온>이 모티브라고? 하지만 < Maycgre 1.0 >의 ‘출격’을 들으면 <에반게리온>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말에 금세 수긍할 것이다. 반도네온으로 연주했지만, 금방이라도 로봇이 출동할 것 같은 호쾌한 느낌이 귀를 감싼다. 그래서 고상지와의 대화는 애니메이션의 오랜 팬이 반도네온을 연주하면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 Maycgre 1.0 >이 애니메이션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고상지
: (유)희열 오빠와 (이)적이 오빠가 안심하고 취향을 보여주는 게 좋다고 해서 여과 없이 다 드러냈는데, 조금 불안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행복감이 훨씬 크다. 나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데, 그런 분들이 트위터에서 “여러분 고상지 씨 좀 파주세요” 이렇게 말씀해주시니까. 특히 그림 작업 시 노동요로 쓴다고 할 때가 제일 감동이었다.

왜 불안했나.
고상지
: 원래 곡을 애니메이션에 모티브를 받아서 쓰는데 주변 뮤지션들은 절대 밝히지 말라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한국에서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싫어해”라고 하더라. (웃음) 사실 나도 그게 뭔지 안다. 한국에서 디즈니를 좋아하는 사람이랑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랑 그 둘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어쨌든 나는 음악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니까 그것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남기는 건 안 좋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정말 전설이신 두 선배님들이 “해! 괜찮아!”라고 말씀해주셔서 용기를 얻었다.

온라인으로 느끼는 것 외에 실질적인 반응도 있었나.
고상지
: 10월 25일에 단독공연을 하는데 400석 규모로 크게 하는 건 오랜만이고, 표 가격도 6만 6천 원이다. 오픈하자마자 표의 55%를 사주신 분들은 내 공연을 기다려주셨던 분들이고, 20%는 내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적극 어필하고 나서 예매해주신 분들이다. 이분들을 위해 공연 때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에반게리온> 커버 곡을 3~4곡 정도 할 예정이다.

< Maycgre 1.0 >은 <에반게리온>의 티저 문구였던 ‘NEXT EVANGELION: 3.0+1.0’이 떠오르기도 하더라.
고상지
: 사실 흉내 낸 건 <슈타인즈게이트>다. 거기에 천재 오타쿠 해커가 있는데, 뭐 하나 발명해놓고 ‘버전 2.07’이라고 붙인다. 주변에서 “그럼 버전 1.0은 어디 있어?” 하면 “그냥 버전 2.07이 이름이야” 이렇게 말하는 게 너무 멋있어서 나도 2.25 이런 식으로 하려다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게 어려워 포기했다. 사실 사인도 <슈타인즈게이트>에 등장하는 암호 ‘El fusay kongru’에서 fusay를 fueye로 바꾸면 반도네온이 돼서 그렇게 변형한 건데 이것도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고민했었다. 그래서 앨범은 그냥 버전 1.0으로 통일!


애니메이션을 모티브로 했지만 재킷은 오히려 일반 연주곡 앨범처럼 보인다. 반대로 ‘출격’이 있는 싱글 < Maycgre >은 오히려 애니메이션 느낌이 확 산다.
고상지
: 사실 싱글의 1번 곡 ‘출격’은 <에반게리온>의 음악감독 사기스 시로의 음악을 듣고 뭔가 ‘빡’ 와서 만든 곡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거기에 맞춰져 있다. 뮤직비디오도 애니메이션 오프닝처럼 만들자 해서 모션그래픽 하시는 분을 소개받아 만들었다. 처음에 만날 때 <에반게리온: Q>에서 아스카가 전투하는 장면 중 에바에서 보이는 게이지 화면을 보여드렸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그때는 나름 혁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생각만큼 반응이 없었다. (웃음)

애니메이션 오프닝이라는 느낌이 따로 있나. 
고상지
: 애초에 애니메이션에 삽입되기 위해 만든 곡이 아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느낌을 내야해!” 이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는다. 내가 감정이입을 하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이에 관해 써볼까 생각을 해도 아무런 느낌이 안 온다. (웃음) 그런데, 애니메이션 장면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 뭔가 오는 거지. 심지어 곡을 쓸 때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일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느낌이 오는 걸까. 
고상지
: <신세기 에반게리온>(TV판)에서 리츠코 박사가 신지와 미사토를 데리고 레이의 정체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수조 속에는 수많은 레이의 껍데기들이 떠다니고 있고, 그때 “아야나미 레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수많은 레이들이 한순간에 신지에게 눈동자를 굴리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나왔던 사기스 시로의 음악, 레이와 미사토 그리고 리츠코 박사의 성격,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연출 등이 하나로 합쳐져 내 안에서 펑 터지는 느낌이었다. 레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부분에서 레이에게 빠져들었다.

선호하지 않는 캐릭터에 꽂히는 게 신기하다. 
고상지
: 예전에 오빠가 사 온 게임 잡지를 볼 때나 <뉴타입>을 볼 때도 그랬는데, 내가 모르는 것이라도 캐릭터와 스토리를 읽는 게 재밌다. 그 상황에서 느껴지는 이미지 같은 게 흥미롭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음악 디자인이나 캐릭터 디자인이나 다 비슷하게 느낀다.

애니메이션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나 보다.
고상지
: 어릴 때는 디즈니 만화영화도 봤었는데, 정말 좋아하게 된 거는 KBS <아벨탐험대>와 MBC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였다. <아벨탐험대>의 배경음악은 어릴 때 했던 <드래곤 퀘스트 3>의 배경음악과 동일했고, 나중에 커서 탱고 음악과 비슷해서 탱고를 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에반게리온>의 사기스 시로가 음악감독이었다. 사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와 <에반게리온> 자체에 빠져 있지는 않았는데 음악이 너무 훌륭해서 정신적인 파급력이 엄청났다.

그냥 들어서는 <드래곤 퀘스트 3>의 음악과 탱고 음악이 비슷하게 들리기 힘들 것 같은데.
고상지
: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냥 음악 듣는 걸 좋아했다. 입학해서 오리엔테이션으로 선배들 공연을 보는데, 밴드 음악에 꽂히면서 ‘서양음악이 되려면 화성이 있고 멜로디가 있구나’라는 걸 깨달아서 밴드 동아리에 들어가 베이스도 배우고 건반도 쳐보고 편곡도 해보려는 찰나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을 듣게 되었다. <드래곤 퀘스트 3> 같은 게임은 흥분 상태에서 계속 반복해 들으니까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비슷한 걸 한 번 들어도 “아! 코드가 똑같아!” 이렇게 되는 거다.


애니메이션도 좋아하고 음악도 굉장히 좋아했는데, 학교는 카이스트에 들어갔다.
고상지
: 뭐, 그것도 음악 한다고 1년 만에 그만두긴 했다. 어릴 때 음대에 갈 생각은 없었고, 워낙에 셈이 빨랐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기계처럼 구몬 수학을 풀었다. 애기 때부터 그렇게 하면 누구나 빨라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웃음)

< Maycgre 1.0 >의 캐릭터 중에 <슈타인즈게이트>의 과학 천재 소녀 크리스가 자신과 비슷한 느낌 때문에 들어간 게 아닌가 생각도 했다.
고상지
: 이공계 느낌이라 좋아하는 건 아니다. 크리스가 일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이 좋다. 어른스럽고 침착하고 징징대지 않고. 남자 캐릭터는 찌질한 타입을 좋아하지만 여자는 반대다.

최근에 좋아하게 된 남자 캐릭터나 애니메이션이 있나. 
고상지
: 나는 부정적인 편이고, 우울하고 열등감이 많이 편이다. 그런 면에서 2014년 최고 애니메이션은 <핑퐁>이었다. 나랑 대입이 돼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보면서 울고 그랬다. <핑퐁>은 탁구가 소재고 거기에 아쿠마란 아이가 나온다. 아쿠마는 노력파인데, 스마일이라는 로봇처럼 탁구를 잘 치는 애와 붙어서 참패했다. 아쿠마가 “나는 너보다 노력도 몇 배나 더 했는데 왜 내가 지는 거야!” 소리치니까 스마일이 “그건 아쿠마에게 탁구의 재능이 없어서 그래. 그렇게 큰소리 낼 거 없어”라고 하는 거다. 그런 게 너무 좋다. “재능이 없는 아쿠마가 노력으로 해냈다!” 이런 거 보면 기분이 좋지 않다. 재능 없는 사람에게 노력만으로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이번 앨범도 밝은 분위기로 시작해서 점점 어두워진다. 
고상지
: <천원돌파 그렌라간>, <에반게리온>, <강철의 연금술사>는 이기지만 너무 많이 죽거나, 잃는 게 많다. 승리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게 잘 나와 있다. 그런 걸 보면 마음이 놓이고 부담이 되지 않는다. 미국 쪽에 그런 분위기가 많이 있지 않나. 부족한 애들이 힘을 내고, 오합지졸 풋볼팀이 강한 팀을 무찌른다. 이런 걸 보면 피곤함을 느낀다. 희망찬 분위기를 두려워하고 섞이고 싶지 않다.

섞이고 싶지 않다는 기분은 왜 들까.
고상지
: 어떤 사람들은 김치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하듯이, 그냥 싫다. 어렸을 때는 누군가 이런 걸 강요하기도 했다. 근데 먹기 싫은 걸 강요받으면 더 먹기 싫듯이, 그럴수록 더 보기 싫어졌다. 뭐 그것도 지금은 강요하는 사람이 없지만. (웃음)

한국 사회에는 그런 걸 강요하는 분위기가 강하지 않나. 
고상지
: 아직도 너무 보수적이고 위계질서가 있는 사람들과 일하는 걸 힘들어하긴 한다. (웃음) 지금은 성인이 됐고 내가 이렇게 어필을 하니까 아무도 내 앞에서 이렇게 긍정의 힘 따위는 주장하지 않지만, 중·고등학교 때 그런 경우가 많았다.

반도네온 때문에 3년 동안 일본도 왔다 갔다 하고 아르헨티나 유학도 다녀왔다. 그곳 분위기는 한국과 다른가. 
고상지
: 탱고 쪽 분위기로 말하자면 일본 탱고 1인자 고마츠 료타는 탱고만 아는 순수한 분이시다. 연습 열심히 하면 좋아하고 안 하면 눈길도 안 준다. 그래서 일명 ‘꼰대’질도 없다. 고마츠 료타라는 거장이 그렇게 하니까 그 밑의 세대들도 겸손하다. 실력은 장난 아닌데. (웃음) 그리고 아르헨티나는 위계질서가 없다.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음악인데, 거장들이 다 한동네에 사는 거다. 횡단보도 지나가다가 “올라 마에스트로!” 인사하면 “에~” 이렇게 대답하고. 올해 돌아가신 오스발도 몬테스라는 거장도 그분이 보시기엔 내가 아직 애기처럼 보였는지 횡단보도 건널 때 위험하다고 내 손을 잡고 건넜다.

만약 일본과 아르헨티나 둘 중에 고른다면 어느 쪽을 다시 갈 것 같나. 
고상지
: 난 일본을 더 좋아한다. 스페인어를 너무 못해서. 일본어는 친구랑 이야기할 때 어려움이 없을 정도는 한다. 이렇게 애니메이션을 하루 종일 보는데 못하면 말이 안 된다. (웃음)

그러면 역시 2집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하게 될까. (웃음) 
고상지
: 내가 반도네온 연주자이긴 하지만, 앨범은 탱고 음악이다. 반도네온은 필요하니까 넣는 것인데 이번 정규앨범이 나온 첫날에 “이 곡이 제일 좋다”고 말해준 사람 5명 중 2명이 반도네온이 들어가지 않은 ‘A Los Am antes’를 선택했다. 그래서 2집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반도네온을 빼도 되겠다는 생각 중이다. 그리고 이번 앨범은 곡 쓰는 데 시간이 걸리다 보니 캐릭터들이 옛날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인데, 만약 2집이 나온다면 2014년 캐릭터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우리 <핑퐁> 아이들이 빠질 리 없겠지. (웃음)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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