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문>의 세책은 정말 금지 대상이었을까

2014.10.07

“세책(민간에서 만들어 돈을 내고 빌리는 책)이 들끓고 있다. 사세가 이와 같다면 백성을 위해 세책을 허하겠다.” SBS <비밀의 문>의 세자 이선(이제훈)은 신하들에게 “세책은 백성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며 세책을 권장한다. 하지만 대신들은 “백성들을 미혹게 하는 잡서”라며 반대한다. 출판의 자유를 허하면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말도 들려왔다. 그래서 <비밀의 문>에서는 세책을 단속하려 하고, 그만큼 세책은 작품의 중요한 소재다. 왕권을 가지려는 영조(한석규)와 신분의 귀천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세자 이선과의 갈등은 신흥복(서준영)의 죽음으로 촉발되고, 이 죽음의 단서를 쥐고 있는 인물은 세책업자의 딸 서지담(김유정)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 시대에서는 <비밀의 문>처럼 <춘향전>이나 <홍길동전> 같은 세책들을 규제하지 않았다.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이민희 교수는 “소설을 금서로 지정한 예는 없으며 세책본 같은 경우 특히 영조, 정조 시대에는 유교 이념에 맞는 소설이 많아서 오히려 권장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애초에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서지담이 수사를 피해 도망 다니다 세자와 마주칠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영조는 조선 시대 역대 왕들 중 가장 소설을 좋아했다. 세책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추판의 종제가 지은 <구운몽>이 매우 좋다”고 말한 기록도 있다. 조선 후기 왕실 도서관이었던 낙선재에는 세책점에서 유통되다 흘러들어 간 책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궁중에서도 소설을 읽을 만큼 소설 읽는 문화는 넓게 퍼져 있었고, 세책방도 성행했다. 초창기 세책업은 서지담의 아버지 서균(권해효)의 본 직업인 책쾌로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책쾌는 사람이 직접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매매하는 직업으로, 현대의 도서중개업자와 비슷하다. 이곳저곳 독자를 찾아다니며 서책을 판매하고 중개하던 책쾌의 경험이,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조선 후기의 시대적 변화에 맞물려 세책업으로 발전했다. 세책업자들은 상인이자 편집자 혹은 출판 기획자로서의 역할까지 담당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책의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 책을 두껍고 질기게 만들고 기름칠까지 하며 질을 높였다. 또한 세책을 빌려 가는 수량에 따라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책 수를 최대한 늘리기도 했다. 책의 분량은 30장 정도고, 행수도 평균 8~11줄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 손가락을 대는 모퉁이에는 빈칸을 두어 침을 발라 종이를 넘길 때 글자가 지워지는 것을 방지하기도 했다. 각 권의 끝에는 대체로 “차간하문ㅎㆍ라”처럼 ‘다음 화를 보아라’라는 뜻의 글귀가 있었고, 소설 첫머리에 전편의 내용을 요약해주기도 했다.


책에 많은 공을 들이고,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보니 책을 빌리는 데는 꽤 돈이 들었다. 장신구나 식생활 용품 등을 저당 잡고 5전 정도를 내면 빌릴 수 있었는데, 당시 물가로 절대 싼 가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정조에 관직을 했던 채제공은 그의 아내에 대해 쓴 <여사서>의 서문에 “부녀자들이 비녀나 팔찌를 팔아 혹은 빚을 내면서까지 서로 싸우듯이 빌려 그것으로 긴 해를 보냈다”고 했고, 이학규는 문집 <낙하생고>에서 “비단 옷을 입은 부녀자들이 언문 번역소설 읽기를 아주 좋아하여 기름불을 밝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음에 새겨가며 몰래 읽어댄다”고 할 만큼 세책은 인기였다.

세책은 주로 중국 소설의 번안 소설과 한글 국문 소설이 주를 이루었다. 17세기 초기에는 남성들이 사대부 여성들을 위해 중국 소설을 번역하다가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와 같은 국문 소설들이 등장했고, 18세기에 소설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면서 세책점이 등장했다. 18세기 후반에는 <사씨전>, <삼국지> 등 중국 고사를 소재로 창작한 번안소설과 창작 국문 소설이 세책점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들 작품은 역사적, 허구적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악인과 대결을 벌이는 영웅담이었다. 또한 세책본 소설은 교양소설이기도 했고, 양반 집안의 법도와 인간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어서 무식한 사람은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세책업이 성행하면서 몰락한 양반들이 소설을 썼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세책은 그 인기와 달리 제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영조 시절 사도세자가 독서를 게을리하자 신하들은 동궁에게 소설을 번역해서 들려주는 방법으로 공부를 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영조는 자신이 한글 소설을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영·정조 시대는 임진왜란 이후 가문의식과 집안 내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유교사상을 강조했고, 사회는 경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열녀가 될 것을 강조하고 출신을 더욱 따졌다. 조정은 세책을 허가해 백성들의 갑갑함을 풀 수 있도록 했지만, 소설이 그 이상으로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많은 부녀자들은 세책을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었다. 현실을 벗어난 멋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서지담의 말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독자들에게는 “책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절실하게 극적인 반전이 필요”했나 보다.

참고 문헌
<조선의 베스트셀러> 이민희 (프로네시스)
<새국어 생활>(24권 1호. 2014년 봄) 국립국어원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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