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지나가는 삶

2014.09.19

<달려라 아비>에서 <침이 고인다>로 이어지는 김애란 단편소설을 읽는 건 마치 2000년대 중반 즈음의 나를 들여다보는 일 같다. 나의 추천으로 김애란의 소설을 읽게 된 사람들도 종종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대개 젊었으나 가난했고, 직업이 없거나 있더라도 다른 직업을 갖기를 원했고,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늘 ‘지나가기만’ 하는 삶(<침이 고인다>, ‘자오선이 지나갈 때’)을 살고 있었다. 당연히 나도, 김애란의 소설 속 ‘나-들’도 그랬다. 그래서 김애란은 좋고 싫고를 말하기 참 애매한 작가였다. 마치 그 시절의 나 자신을 두고 좋아하거나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몇 년 뒤 김애란의 세 번째 소설집 <비행운>이 집에 도착했을 때 난, 서른 살이었다. 여전히 가난했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지도 않았고, 나의 ‘네모난 자리’였던 옥탑방마저 잃은 상태였다. 김애란의 소설에는 여전히 그런 ‘나-들’이 있었다. 남몰래 좋아했던 선배의 부탁에 레슬링복을 입고 푸드파이터와 대결하게 되는 백수(‘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조금씩 “그럴듯해” 보이는 삶을 살고는 있지만 실은 “멀리 쫓겨난 사람”처럼 느끼는 직장인(‘큐티클’). 하지만 여전한 ‘나-들’이 <비행운>의 전부는 아니다. 거기엔 세상의 종말과 같은 순간에 홀로 살아남아 골리앗 트레인 위에서 버티는 소년(‘물속 골리앗’)이, 조선족 아내를 잃고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를 물으며 서울을 달리는 택시 운전기사(‘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와, 교도소에 있는 아들에게 사식을 넣어주기 위해 추석에도 추가 근무를 하기로 결정한 인천공항의 청소부(‘비행운’)도 있다. “컴컴한 빈방, 그 네모난 부재”(<침이 고인다>, ‘네모난 자리들’)의 문을 열고 나온 ‘나’는 이제 나 바깥의 세상을, 그 세상의 또 다른 어둠을 본다.

그리고 마침내 이 소설집의 마지막 단편 ‘서른’에 당도했을 때, 그 ‘나’가 어떤 세상에서 어떤 오늘을 살고 있는지 알게 됐다. 상경한 그녀는 “공책만 한 창”이 나 있는 여섯 번째 자취방에 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빚을 진 사람이라는 건 똑같은데. 좀 더 나쁜 채무자”가 되어 온갖 알바를 전전하다 “이상한 회사”에 들어가게 된 ‘나’는 학원 강사 시절의 제자를 대신 그 자리에 데려다 놓고서야 그 지옥을 빠져나온다. 그래도 삶이라는 지옥은 끝나지 않아서, 모든 것은 매 순간 조금씩 계속 나빠져 간다. ‘나’만이 아니라, 아마도 세상 전부가. 그런 ‘나’의 눈에 보이는 미래도 다르지 않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정말 ‘서른’이 된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쩌면 희망”(<달려라 아비>, ‘종이 물고기’)마저 없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 모르고, 되어갈지 모를 생을 바로 여기,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빵집 카드를 보면서 자신을 떠올려준 언니에게 편지를 띄우며 ‘안녕’을 당부하듯, 우리는 스쳐 갈 뿐인 삶의 작은 부분에서 서로를 발견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미래란 ‘자오선이 지나갈 때’ 속의 내가 결국 ‘서른’의 내가 되었듯이, <침이 고인다>를 읽던 내가 <비행운>을 읽는 내가 되고, 또 그다음 소설집을 읽을 내가 되리라는 것 정도일 테다. 겨우 그 정도라도 거기서 때때로 ‘나’를 발견하고, 그 바깥까지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함께,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면서.

윤이나
보험과 연금의 혜택을 호주 공장에서 일할 때만 받아본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책도 읽고, 영화와 공연도 보고, 축구도 보고, 춤도 추고, 원고 청탁 전화도 받는다. 보통 노는 것같이 보이지만 쓰고 있거나 쓸 예정이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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