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위대한 동기의 소소한 시작

2014.08.21
<슬램덩크>는 하나의 미약한 동기가 어떻게 위대한 자아의 신화를 이뤄내는가에 대한 면밀한 추적이다.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얼마 전 누군가의 사진에 찍힌 나를 보고 작은 충격을 받은 이후로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생각이었다. 사실 미용의 목적보다는 건강과 생존을 위한 결심이었고 만화 연재를 위해서는 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매우 잘 알듯, 이런 종류의 각오는 휘발성이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PT샵이라는 곳에 등록을 해 보았다.

수많은 퍼스널 트레이너들의 광고에는 언제나 멋진 몸매의 트레이너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가만히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정도까지 몸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운동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잘 안다. 이런 종류의 복근은 체지방이 거의 없어져야 가능하다. 운동과 식이요법 중 하나라도 빠지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몸매들이다. 구체적인 고통의 과정을 몸이 알기 때문에 더더욱 대단해 보인다. 과연 이 트레이너들의 동기는 뭐였을까. 우리가 가끔씩 접하는 몇몇 거인들의 위대한 업적 뒤에는 늘 강한 동기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고 그런 우리들에게는 아주 강력한 동기, 위대한 결의 같은 것이 생기기가 쉽지 않다. 과연 위대한 업적들은 늘 위대한 동기로 출발할까.

주인공의 동기는 스토리를 쓸 때에도 아주 중요한 요소다. 주인공이 행동하는 이유가 독자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독자들은 전혀 만화에 이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주인공의 동기는 처음에는 작고 소소하다. 중요한 것은 ‘작고 소소한 동기가 조금씩 진화하는 것’이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채소연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농구를 시작한다. 정말이지 불판 위의 에탄올처럼 순식간에 증발할 수도 있는 미약한 동기다. 하지만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강백호의 동기는 눈부시게 진화하고 결국 그는 자아의 신화를 어느 정도 이루어낸다. 강백호의 동기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개인적으로 동기의 진화에 도움을 주는 것들은 라이벌, 멘토, 그리고 바닥을 치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강백호는 마냥 채소연이 좋아서 농구를 시작하지만, 본격적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시점은 서태웅이라는 라이벌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거기에 안 선생님이라는 멘토까지 가세하면서 조금씩 위 단계의 동기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한 번씩 패배의 고통을 통해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것도 잊지 않는다. 처음 능남고와의 시합에서 윤대협에게 패배했을 때에도, 해남고와의 접전에서 패스미스를 범하고 자책감에 삭발을 했을 때에도 그렇다. 사이어인들은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더욱 강해지고 동기는 바닥을 칠 때마다 더욱 단단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보다도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취의 경험이다. 헬스와 다이어트의 고통을 참아내던 한 사람의 동기가 가장 강력해지는 시점은 변화한 자신의 몸매를 거울 속에서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 때부터 동기는 자발적이고 내적인 동기로 거듭나게 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닭가슴살을 씹으며 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이런 성취의 경험은 자기 확신의 씨앗을 뿌려주고 그 씨앗이 뿌리를 박을수록 자존감의 깊이도 깊어진다. 강백호 역시 동기의 위기가 올 때마다 조금씩 성취의 경험을 맛본다. 농구부 입단의 순간에서도 채치수를 내동댕이치며 덩크슛을 성공시켰고 상양 전에서의 강렬한 덩크슛 역시 (비록 퇴장 당하게 되었지만) 인상 깊은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시합 직후, 친구 양호열에게 강백호가 했던 대사는 “나… 왠지 점점 자신이 있어진다”였다. 그 뿐 아니라 안 선생님과의 특훈으로 2만개의 점프슛을 던졌을 때에도 그렇다. 모두가 잠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슛 폼이 변화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돌려보며 주먹을 쥐는 강백호는 이미 누가 시켜서 훈련을 하는 단계를 한참 벗어나 스스로의 동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고 보통의 동기는 원래 휘발되게 마련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을 위한 위대한 동기는 이러한 소소하고 별 것 아닌 동기가 진화를 거듭하여 이루어내는 기적 같은 일이다. 친구가 칭찬해준 한 장의 낙서에서 시작하여 대 작가가 된 선배 만화가들을 보며, 동료 작가들과의 경쟁과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는 마감의 밤 속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는 선배들의 멋진 작품을 통해 얻는 감동 속에서 나는 오늘도 이러한 기적을 발견하곤 한다. 그런데 걱정이다. 과연 이렇게까지 썼는데, 다이어트에 실패하면 어쩌지.

이종범
<닥터 프로스트> 작가로 일 벌이길 좋아하는 참치형 만화가.
덕력과 잉여력의 위대함을 신봉하지만 정작 본인은 마감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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