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아프리카>, 모래바람과 함께 실려 온 아주 오래된 친구

2014.08.22

유럽 여행 숙소를 예약하는 중이다. 며칠째 검색을 거듭하고 있지만, 실제 예약은 단 하룻밤도 하지 못했다. 축구경기와 뮤지컬 티켓에 써야 할 돈만 해도 상당한 터라 숙소의 질을 내려놓았더니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해진 탓이다. 18인실 도미토리가 있는 호스텔로 시작해, 에어비엔비 숙소나 별 하나짜리 호텔, 무료지만 소파에서 자야 하는 카우치서핑까지. 어딘가는 시끄럽지만 재미있을 테고, 어딘가는 편안하지만 외로울 것이다. 어딘가는 흥미롭지만 위험할 테고, 어딘가는 멋진 대신 엄청난 요금을 지불해야 할지 모른다. 내 집조차 완벽하지 않은데, 모든 여행자를 만족시켜줄 숙소가 과연 존재할까. 하지만 나는 그런 숙소를 하나 알고 있다. 편안하고 따뜻하며, 다정한 사람들이 있고, 잠시 머물러도 오래 그리울 곳. 바로 <호텔 아프리카>다.

미국 유타주, 관광지도 도시 근교도 아닌 국도변의 2층집을 개조한 호텔 ‘아프리카’. 성미가 깐깐하긴 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할머니 마지와 그녀의 딸 아델라이드가 운영하고 있다. 아델라이드는 네댓 살쯤 된 아들 엘비스를 키우고 있는데, 맞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 엘비스다. 2층에는 한 인디언 청년이 “아주 오래” 묵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지요다. <호텔 아프리카>는 청년이 되어 뉴욕에 살고 있는 엘비스의 시점에서 시작해 ‘호텔 아프리카’에서 그들과 함께 보낸 유년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각자의 사연을 품고 호텔 아프리카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의 짤막한 이야기는 엘비스가 에드, 쥴이라는 친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오늘과 겹쳐진다.

이 작은 호텔의 가장 멋진 점은,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돈이 있든 없든, 인종이 무엇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쉬었다 갈 수 있다. 나는 <호텔 아프리카>를 통해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본 적도 없던 내게 인종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도 이 만화였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성별과 관계없다는 사실도 이 책 덕분에 알게 되었다.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를 처음 본 것도 이 책에서였다. <호텔 아프리카>에서는 ‘검은 엘비스’ 트란과 백인 아가씨 아델라이드의 사랑 이야기가 있는 그대로 아름다웠고, 에드가 동성의 친구 이안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그랬다. 그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사랑 때문에 가슴이 벅찬” 존재들이었다. 이 책을 끼고 살던 여중생 시절의 나는 세상이 더도 덜도 아니고 꼭 그 호텔만 같기를 원했다.

무엇보다 <호텔 아프리카>는 내가 처음으로 내 돈으로 사서 모았던 만화책이었다.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방과 후 시내의 서점에 들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 비닐을 벗기곤 했다. 이 만화를 보고 또 보면서 읽을 때마다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울고 웃었고, 작가가 숨겨둔 복선을 발견하고는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행복해했으며, 마지막 장면 이후 그들이 살아갈 내일을 상상하고 그려보곤 했다. 그러니까 <호텔 아프리카>는, 내 안의 ‘덕후’를 깨운 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책장에서 다섯 권의 책을 꺼낼 때마다 묵은 책 냄새에 유타의 모래바람 냄새가 섞여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여전히 여중생의 기질을 벗지 못한 나는, 때때로의 여행길에서 나만의 ‘호텔 아프리카’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사랑할 줄 아는 자들만이 오고 가는” 그런 공간. 하지만 그렇게 찾아다니다 결국 찾지 못해 “지치고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해도, 돌아온 내 방 책장에는 <호텔 아프리카>가 꽂혀 있겠지.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말이다. 사실, 그거면 됐다.

윤이나
보험과 연금의 혜택을 호주 공장에서 일할 때만 받아본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책도 읽고, 영화와 공연도 보고, 축구도 보고, 춤도 추고, 원고 청탁 전화도 받는다. 보통 노는 것같이 보이지만 쓰고 있거나 쓸 예정이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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