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밖의 이순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2014.08.18
그냥 영웅도 아니고 성웅(聖雄)이라 불린다. 실전에서 23전 23승을 거뒀다. 달리는 말에서 내동댕이쳐져 다리가 부러지자 버드나무 가지 껍질을 벗겨 싸매고 다시 일어났다. 임진왜란 7년 전쟁 최후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했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훌륭한 캐릭터가 실존했던 인물이라니, 최근 <명량>의 관객 수 1,200만 돌파는 세종대왕과 함께 우리나라 위인 양강 구도를 이루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폭발적 인기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의 영광과 승리 뒤에는 고통과 피로에 젖은 매일이 있었고, 이순신은 개인적인 고민과 장수로서의 고뇌에 압사당하지 않기 위해 무수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일기장에 미운 사람의 험담을 적거나 문제가 있을 때 점을 치는 등 지극히 인간적인 면도 있었다. 다음은 <난중일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들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이순신이라는 위인이자 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다.

<난중일기>(1978)의 김진규, <조선왕조 500년>(1986)의 김무생, <불멸의 이순신>(2004)의 김명민, <천군>(2005)의 박중훈, <구가의 서>(2013)의 유동근, <명량>(2014)의 최민식.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매우 잘못되었기에 곤장을 쳤다” (계사년 6월 18일)
이순신은 엄격한 상사였다. 병선을 수리하지 않은 군관들을 잡아다 곤장을 쳤다. 이웃집 개에게 피해를 끼친 토병도 곤장을 쳤다. 술병을 훔치다 붙잡힌 종도 곤장을 쳤다. 심지어 그 앞에서 “오만을 떨다가” 곤장 70대를 맞은 수군도 있었다. 전시에 기강을 잡기 위해서는 지엄한 군율이 필요했다. 도망갔다 잡혀 온 군사들이나 여러 차례 양식을 훔친 자, 소를 훔쳐가면서 왜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자들은 가차 없이 목을 베어 효수했다. 자신이 언제나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만큼 부하들에게도 강한 책임감을 요구했다. <난중일기>에는 명량해전 당시 장수들의 배가 멀찌감치 물러서 있자 이순신이 뱃전에서 거제 현령 안위를 직접 불러 했던 말이 적혀 있다. “네가 억지 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 이 간결하지만 살벌한 질문을 듣고 황급히 교전지로 뛰어들었다는 안위가 조금은 안쓰러워지는 것은 왜일까.

“공무를 본 뒤에 활을 쏘았다” (임진년 1월 14일)
이순신은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7년 동안 성실히 써 내려간 <난중일기>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문장은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와 “활 10순(1순은 화살 다섯 대)을 쏘았다”다. 하루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고 일했다는 이순신의 빠르고 합리적인 결재는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였지만 정작 그는 “모두 수군에 관계된 일이기 때문에 늘 보고 듣고 해서 익숙할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염병에 걸렸을 때조차 “장수 된 자가 죽음에 이르지 않은 한 어찌 누워 있을 수 있겠느냐”며 쉬지 않고 일했다는 그는 부하들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충무공 행록>에 적힌 당포해전(1592) 당시의 일화를 보자. “한낮까지 싸운 다음 군사들이 겨우 좀 쉬려고 할 무렵 갑자기 적이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공(이순신)은 짐짓 못 들은 체하였다. 그러자 또다시 급보하기를, 적들이 수도 없이 온다고 하였다. 공은 성난 목소리로, 적이 오면 싸우면 되지 왜 이리 소란이냐고 하였다. 그렇게 말한 것은 그때 장졸들이 모두 힘껏 싸운 끝에 지쳐서 자못 당황하는 빛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울지 말고 강해져라. 적이 오면 약한 소리 하지 말고 싸우면 되는 것이다.

“작은 얼룩말이 먹지를 않으니 이는 더위를 먹은 탓이다” (정유년 6월 11일)
이순신은 엄하면서도 따뜻한 리더였다. 변방에 근무하던 시절 상을 당한 병사가 타고 갈 말이 없어 걱정하자 그는 “평소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구해주는 일에 어찌 알고 모르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가”라며 자신의 말을 내주었다. 왜적에게 ‘귀신’이라 불릴 만큼 무서운 상대였던 이순신이었지만, 항복해 온 왜인들에는 비교적 관대한 통치자였다. 귀순한 왜인들이 마당놀이를 간절히 하고 싶어 하자 내심 마땅치 않게 여기면서도 광대놀이를 금하지 않았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사람뿐 아니라 귀신의 마음까지도 헤아렸다. 전시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자 죽은 군사와 백성들을 제사 지내주려 했는데, 이날 새벽 그의 꿈에 물에 빠져 죽은 귀신들이 나타나 원통함을 호소했다. 이들이 “오늘 제사에서 전쟁과 병으로 죽은 사람들은 다 얻어먹을 수 있는데 우리들만 빠져 있다”고 슬퍼하자 이순신은 제문을 살펴보고 그들도 같이 제사 지내줄 것을 명했다고 하니, 실로 상냥하지 않은가.

“천지 사이 원씨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을미년 11월 1일)
이순신에게는 숙적이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과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였던 원균의 불편했던 관계는 유명하다. 또한 원균이 이순신을 드러내어 비방하고 다닌 것과 달리 이순신은 자신을 모함하는 소리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난중일기>에는 원균을 향한 이순신의 솔직한 심정이 수십 차례 적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순신이 다른 인물들에 대해 비교적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건조하게 기술한 것에 비해 원균에 대해서만큼은 “가소롭다”, “해괴하다”, “망령되다”, “음흉하다” 등 상당히 격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원균의 심한 술주정과 잘못된 일 처리에 종종 심한 불쾌감을 드러냈고 “원 수사가 올린 상은 무척 어지럽건만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스웠다”, “활쏘기를 하였는데 원 수사가 9분을 지고 술이 취해서 갔다” 등 사소한 일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런데 누군가를 오래 미워하다 보면 그가 내 삶의 일부로 들어앉게 되는 법이다. “꿈에 원공(원균)과 함께 모였는데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내올 때 원균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징조를 잘 모르겠다”는 일기에서는 꿈에서도 원균을 떠올리고 만 이순신의 분하면서도 알쏭달쏭한 심경이 느껴져 어쩐지 미소를 띠게 된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조금 놓였다” (갑오년 7월 13일)
이순신도 미신을 믿었다.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지냈고, 나라와 백성에 대한 걱정을 한시도 놓지 못했던 이순신은 홀로 꿈을 해석하거나 점을 치곤 했다. 명량해전 전날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는 일기는 특히 흥미롭다. 물론 그가 매일 밤 꿈에서 영의정(유성룡)과 만나 나랏일 걱정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서 손짓을 하는데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거나 “부안의 첩이 아들을 낳았는데, 달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이지만 내쫓아버렸다”처럼, 꿈에서도 허튼수작은 용서치 않는 성품을 느낄 수 있는 기록도 있다. 또한 이순신은 가족이 아플 때, 날씨가 궁금할 때, 왜적을 쳐야 할 때 직접 점을 쳐서 앞날을 내다봤다. 애매모호한 괘가 나오면 다시 점을 쳐서 ‘길하다’고 나온 괘를 믿고 싶어 하기도 했다. 별것 없을 줄 알면서도 별자리 운세나 오늘의 운세를 찾아보는 우리들처럼, 그 역시 불안한 마음을 다스릴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는 말에 종들을 매질하고 쌀을 돌려주었다” (정유년 6월 3일)
이순신은 대쪽 같은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은 없어서 100가지 꿈 중에서 한 가지도 자기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며 슬퍼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 없었던 것은 운보다도 요령이나 꼼수였던 것 같다. 병조판서가 자신의 딸을 첩으로 보내려 했으나 “내가 처음 벼슬길에 나와 어째 권세가의 대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는가”라며 거절했고, 이조판서 율곡 이이가 한 번 만나기를 청했을 때도 그가 관리임면권을 가진 직책에 있는 동안 만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순신은 인맥을 만들기는커녕 뻗어오는 인맥도 쳐내는 사람이었다. 그 밖에도 자신보다 높은 벼슬아치들이 친분으로 승진에 개입하려 하거나 관가의 물건을 사사로이 쓰려고 할 때마다 이순신이 조목조목 반박하는 바람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는 기록들은 이 깐깐한 인물이 얼마나 팍팍하게 조직 생활을 견뎌 나갔을지 짐작하게 한다. 심지어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을 때 뇌물을 써보라는 주위의 권유에 “죽게 된다면 죽을 뿐이지, 왜 바른길을 어기고 살길을 찾겠느냐?”며 화를 냈다고 하니,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한 것은 비겁하게 사는 길뿐이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여해)
<징비록> 유성룡 지음, 김기택 옮김 (알마)
<충무공 이순신 전서> 박기봉 편역 (비봉출판사)
<임진왜란 해전사> 이민웅 지음 (청어람미디어)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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