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천재들의 끔찍한 가르침

2014.08.14
청강대 만화과에 강의를 나갔을 때의 출석부. 너무 힘들었지만 정말 좋았던 기억.

나는 만화가가 되기 전에 영어학원에서 영문법을 오래 가르쳤다. 직업으로 치자면 강사가 먼저인 셈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웹툰작가 중 강의를 많이 하는 부류에 나도 포함되는 것 같다. 강의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중에는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 강의도 있고, 대학 만화과에서 스토리를 가르치는 일도 있었으며, 진로 관련 특강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간혹 동료 작가들은 강의를 너무 많이 하는 게 아니냐며 걱정해준다. 하지만 장담한다. 누군가를 가르쳐보는 것만큼 좋은 공부는 없다.

중학생 시절 늘 전교 1등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주변에는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려는 친구들이 항상 줄을 서 있었다. 어지간히 귀찮았을 텐데도 그 친구는 늘 다른 친구들의 과외선생 역할을 불평 없이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가 작은 수술을 위해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믿을진 모르겠지만) 우리 반에서 그 친구 바로 다음 등수는 나였다. 그 친구를 대신해서 질문 공세를 대신 받게 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 어쩌지. 귀찮은데.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한 것들을 주변 친구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모호하던 정보들이 명확하게 정리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은 대부분 완전히 내 것이 되기 전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내가 어떤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날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핵심과 비교적 덜 중요한 부분들이 구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흔히 수능 만점자들이 쓴 책이나 인터뷰를 읽어보면 비슷한 말이 많이 나온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누군가를 가르칠 수 없다.

시간이 흘러 만화가가 되고 연재가 이어지면서 조금씩 강의의 기회가 왔다. 신인 작가였던 나는 마감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수락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과거의 다양했던 독학 경험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경험에는 언제나 누군가를 가르치며 스스로 레벨업을 했던 기억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과감하고 뻔뻔하게 강의를 수락했다. 그리고 내 예상과 기대는 적중했다. 그동안 혼자서 만화 연출과 스토리 작법, 캐릭터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나 어설프게 알고 있었던 것들이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식을 책에 비유한다면, 공부를 할 때에는 그 정보들을 잘 정리해서 넣어둘 책꽂이가 필요하다. 그리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행위는 매우 잘 정리된 책꽂이, 즉 지식의 틀을 만들어주는 효과를 갖고 있다. 따라서,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강의를 한다는 것은 학생들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준다. 지금도 무언가를 공부할 때면 혼자서 누군가에게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상상을 하며 이해를 도모하곤 한다.

그렇다고 내가 만화를 매우 잘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담이지만 무언가를 잘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다. 천재적인 작가의 강의를 들어본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왜 그렇게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곤 한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뭔가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혼란에 빠진다. 왜 이걸 못하지? 선동열 감독과 차범근 감독은 거기서 왜 그 공을 못 던지고 왜 골을 못 넣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강사도 울고, 학생도 울게 된다. 반면 무언가를 못해본 사람들은 이해의 과정과 장애물을 모두 겪어봤기 때문에 좋은 선생이 될 소질을 갖고 있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자의식이 강한 편이다. 좋은 의미에서도 그렇고, 안 좋은 의미에서도 그렇다. 이 업계에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많은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들은 ‘자신이 존경하는 대상에게서만’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나 대학에서 만화를 공부하는 많은 전공생들이 유명 작가 출신이 아닌 교수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걸 느낄 때가 많다. 그건 정말이지 큰 실수다. 그런 오만에 빠져 있을 시간에 차라리 스스로 누군가를 가르쳐볼 기회를 만들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이종범
<닥터 프로스트> 작가로 일 벌이길 좋아하는 참치형 만화가.
덕력과 잉여력의 위대함을 신봉하지만 정작 본인은 마감 좀비.

교정. 김영진




목록

SPECIAL

image 멜론 차트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