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멋진 마술은 관객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다

2014.07.31
도구 마술은 하나로 한 가지 마술밖에 할 수 없지만 카드는 한 벌만으로도 다양한 마술을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나는 10대 시절에 이사를 많이 다녔기 때문인지 학교에서는 친구가 많아도 집에 오면 늘 혼자 놀았다. 하지만 나의 10대 시절은 온갖 로망들의 총집합이었고 로망으로 가득한 10대 소년은 원래 혼자서도 항상 바쁜 법이다. 만화나 악기, 휘파람처럼 지금 돈을 벌어다 주는 대부분의 장사 밑천들은 그 당시 친구 대신이었던 것들이다. 

마술도 그런 로망 중 하나였다. 명절만 되면 마술쇼 방송에 넋을 잃었고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그랜드 일루젼 마술에 기절하다시피 했다. 이은결 씨가 쓴 책을 사다가 혼자서 연습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의욕과 성취의 불균형’은 더운 날의 맥주보다 빨리 열정의 김을 빼기 때문에 그 후로 거의 20년 가까이 마술에 대해서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만난 한 출연자가 직접 마술 몇 가지를 가르쳐 주면서 화석이 되기 직전의 로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로 기연이 이어졌다. 작업실 근처 숙소 건물 1층에는 편의점이 하나 있는데 그 곳 야간 아르바이트생 청년이 알고 보니 직업 마술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요즘은 마술을 배우고 있다.

만약 자신이 무언가 한 가지에 빠져있는지가 궁금하다면 단 하나만 보면 된다. 일상 속에서 무엇을 보건 그 안에서 특정한 한 가지를 계속 떠올리게 된다면 그것에 단단히 미쳐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만화와 이야기에 미쳐있는 듯하다. 마술을 배우면서 아주 많은 지점에서 만화와 이야기에 대한 배움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마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 중 하나가 미스 디렉션이다. 간단히 말하면 관객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모든 수단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알면 알수록 오묘한 깊이가 있는 개념이다. 미스 디렉션을 위한 방법은 무궁무진하지만 내가 느낀 공통점은, 트릭을 파헤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걸리기 쉽다는 것이다. 마술을 즐길 줄 모르는 이가 트릭을 발견하겠답시고 뚫어지게 감시할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정말 중요한 것은 못 보게 된다. 그럴 땐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전체를 봐야 잘 보인다. 마치 인생 같고 스토리 같아서 가감 없이 즐거웠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 입장에서도 독자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나중을 위해 들키지 않으려면 숙지해야할 좋은 레슨들이 가득하다. (사실 숙련된 마술사의 트릭은 인간 본능에 기댄 미스 디렉션을 거치기 때문에 이런 점들을 알고 있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그러니 즐거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당해주길 권한다.)

내 마술선생님의 말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멋진 마술은 관객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었다. 관객이 직접 섞은 카드 안에서 관객이 직접 뽑은 카드로 이루어지는 마술은 능숙한 마술사의 현란한 손끝에서 탄생하는 마술보다 (소박할지는 몰라도) 더 신비롭다. 같은 마술을 하더라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카드가 다른 카드로 변화하는 것보다, 관객의 손 위에 올려놓은 카드가 변화하는 편이 훨씬 더 놀랍다는 뜻이다. 이 지점 역시 좋은 스토리와 너무나 닮아있다. 좋은 스토리는 스토리텔러가 아니라 독자에 의해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좋은 스토리는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진정으로 시작된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독자를 몰입시키지만, 좋은 이야기는 독자의 삶을 바꾼다. 우열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분명 더 ‘오래가는’ 이야기들의 특징은 작가가 전달한 절반을 받아 독자가 자기 삶에서 나머지 절반을 이어가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이다. 스토리의 세계는 마술과 같다는 식상한 표현이 요즈음 내게는 선명한 화질로 재현되고 있다.

이종범
<닥터 프로스트> 작가로 일 벌이길 좋아하는 참치형 만화가.
덕력과 잉여력의 위대함을 신봉하지만 정작 본인은 마감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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