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당신이라는 약

2014.07.25


지난겨울은 더웠다. 아니, 그냥 겨울이 없었다고 말해야겠다. 한국이 겨울을 지나가는 동안, 호주가 속해 있는 남반구는 여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여름 감기에 걸려 호되게 앓으며 기침을 멈추지 못했던 때, 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를 다시 읽고 있던 중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물을 /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 / 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여름에 부르는 이름’)다는 구절을 읽으며, 나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한국의 겨울을 생각했다. 이 시집을 손에 쥐면 언제나, 2012년에서 2013년을 넘어가던 그 겨울, 나에게만은 아직도 지난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계절이 떠올랐다.

그해 겨울은 추웠다. 앞으로 5년 더, 하고 생각할 때마다 바람이 살 안쪽까지 파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도 혹독한 추위라 감기가 유행했고, 유행하는 건 모두 치르고 넘어가는 인간인 나는 어김없이 심한 감기에 걸려 일주일이 넘도록 집에만 머물러야 했다. 할 일은 없고, 트위터의 짹짹거림은 갈수록 시끄러워지던 날들이었다. 우연히 타임라인에서 심보선 시인이 시작한 ‘소리연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추운데도 기어이 높은 곳에 올라 ‘함께 살자’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마트폰의 녹음 어플을 이용해 그들에게 응원의 소리를 전하자는 연대가 소리연대였다. 이미 올린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보니 누군가는 시를 읽고, 누군가는 편지를 읽고, 누군가는 노래를 했다. 왜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녹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박준 시인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전, 마찬가지로 고공농성 중이던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을 위해 희망버스가 부산까지 내려갔을 때 그가 쓴 시 ‘당신이라는 약’을 읽게 된 것이다. 이 시집의 제목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는 그 시의 첫 구절을 따온 것이다. 몇 번의 녹음을 하며 겨울이 가고 3월, 이 시집을 선물해준 친구와 함께 평택에 갔다. 봄이 찾아온 평택의 쌍용차 농성장 앞에서 내가 소리를 전하던 그 송전탑을, 그 위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았다. 친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농성 텐트에 홀로 앉아 또 녹음을 했다. 자동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도로 옆, 바람과 차의 소음 속에서 나는 시를 읽기 시작했다. “아픈 우리가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는다”(‘당신이라는 약’)

정작 이 시집에는 그 시가 실려 있지 않다. 대신 마치 그에 대한 답과 같은 ‘당신이라는 세상’이라는 시가 있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 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이 시집 안에는 언제 어떤 순간에나 미인(美人)인 당신과, 그를 세상으로 삼은 내가 있다. 청파동과 파주, 경주, 철원, 통영과 같은 지명은 이국의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거기 당신과 내가 있기에 그 낯선 공간에서의 시간이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마음 한철’)가 되기도 한다.

고공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지난봄 여행길에서 친구를 잃은 학생들이 길을 걷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도,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고 있을 때도, 난 박준의 시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미인이며, 누군가를 미인으로 삼고 살아갈 우리들이 서로의 얼굴에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꾀병’) 때면, 서로가 그 볕을 만지며 “그렇게 좋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지금 울고 있는 이에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이다. 지난겨울 알지 못하는 높은 곳으로 소리를 올려 보냈던 것처럼, 약이 되어주고픈 사람을 만나면 박준의 시를 읽어주고 싶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이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윤이나
보험과 연금의 혜택을 호주 공장에서 일할 때만 받아본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책도 읽고, 영화와 공연도 보고, 축구도 보고, 춤도 추고, 원고 청탁 전화도 받는다. 보통 노는 것같이 보이지만 쓰고 있거나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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