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석·정재일 “영혼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음악을 하고 싶다”

2014.07.16
서울법대 출신 소리꾼이나 슈퍼 멀티 플레이어. 한승석과 정재일은 종종 이렇게 소개된다. 맞다. 하지만 그 수식어는 둘의 수많은 가능성을 감추는 함정이다. 두 사람이 궁금하다면 그냥 이들의 음악을 들어라. 지난 6월에 발매한 <바리 abandoned>는 국악, 크로스오버 혹은 월드뮤직이라는 카테고리 그 어디에도 선뜻 들어갈 수 없다. 75분 동안 공연되는 한 편의 수묵화 같은 앨범에는 판소리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거창한 포부도, 자신들의 능력을 뽐내겠다는 계산도 없다. 여기에는 소리와 타악을 하는 한승석과 음악을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는 정재일의 경험과 정서의 무게가 켜켜이 쌓인 그저 좋은 음악이 있을 뿐이다. 오는 7월 19, 20일 공연을 앞두고 만난 이들 역시 그들의 작업에 대한 소회를 담담히 들려준다. 작품은 사람을 닮는다. 한승석과 정재일을 만나 증명해낸 명제다.
정재일(왼쪽)과 한승석.

한승석&정재일의 이름으로 낸 첫 앨범 제목이 <바리 abandoned>다. 바리설화를 바탕으로 버려짐과 죽음, 구원을 음악으로 풀어냈는데 시작으로서는 너무 무거운 주제는 아닌가.
한승석
: 재일 씨랑은 2001년에 처음 푸리에서 만나서 이런저런 작업을 함께 했는데 ‘자룡, 활 쏘다’ 같은 건 음악적으로 굉장히 다이내믹해서 그 곡을 듣는 사람들이 늘 깜짝 놀라곤 한다. 그런데 사실, 그건 <삼국지> 얘기이고 상황 묘사가 대부분이라 늘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 이후로 새로운 작업을 하게 된다면 동시대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자 했다.
정재일: 하나의 기록물이 CD여야 했고, 그 곡들이 판소리처럼 서사가 있기보다는 곡 하나로서도 음악적 기능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시대 멘토들의 메시지로 풀어보자는 얘기도 있었다. 그런데 각자가 다른 얘기를 하더라도 하나로 꿰는 주제가 있어야겠더라. 바리설화는 무속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무속은 한국 전통 중에서도 굉장히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고대설화가 지금도 유효한 지점들이 많다고 생각했고, 계속 가슴 깊은 곳 얘기를 하다 보니 침잠하고 어두워지기도 했다. 밝은 곡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는데… 그냥 포기했어요. (웃음) 우리가 이렇게 생긴 것 같애.

바리설화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해낸 건가.
한승석
: 바리설화와 관련된 책들이 진짜 엄청난데, 그걸 다 읽고 논문도 다 찾아보고 세미나 아닌 세미나를 좀 했다. (웃음) 바리는 부모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했지만 그것을 긍정으로 품어 구원의 세계로 간다. 그것은 아버지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구원이기도 했지만, 버려진 자기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체적으로 용서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위한 용서가 아닌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기 위한 용서.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로 시작하지만 이주노동자나 아프리카 난민에 대한 이야기로 대상이 넓혀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가.
한승석
: 아프리카 난민에 대한 ‘건너가는 아이들’은 바리랑 딱 맞아떨어진다. 바리가 아버지의 생명수를 구하기 위해 저승여행을 하는데,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곧 이 시대의 바리들인 셈이다. ‘아마, 아마, 메로 아마’의 네팔인 이주노동자 마덥 쿠워 역시 마찬가지다. 바리가 하늘에서 죄를 짓고 귀향 온 저승신 무장승을 만나는데, 무장승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려면 살아 있는 처녀를 만나 아이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구원을 기다리는 신인데, 마덥 쿠워 역시 죽은 채로 구원을 기다리지만 부모가 오지 못하는 상황이다. 현대 우리의 삶이 설화와 딱 맞아떨어지는 거지. 물론 이 내용들을 모두가 알지 못하더라도, 두 대상은 모두 소외된 존재이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서 좀 더 넓은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었다.

‘아마, 아마, 메로 아마’
같은 곡은 내용상 한없이 서정적일 수 있는데 굉장히 휘몰아친다.

정재일
: 그 곡은 사연이 있다. (웃음) 콘셉트에 대한 서로의 이해도 좀 시간이 걸렸고 막연하게 서정적인 곡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진척이 잘 안 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형이 그냥 휘모리로 해보자고 해서 그 위에 즉흥적으로 선율을 붙인 거다.
한승석: 사실 난 그냥 내지르면 된다. 그만큼 재일 씨에 대한 신뢰가 있다. 2001년 송년음악회 같은 데서 처음 작업을 같이 했는데 그때 했던 게 ‘비나리’였다. 비나리는 리듬 자체가 불규칙해서 굉장히 잘한다는 사람들도 비나리를 연주하면 헤매는 경우가 많다. 그걸 처음인데도 완벽하게 하는 거다. 그 순간 이 남자에게 꽂혔지. 보통 놈이 아니구나. 천재에 대한 경외심? (웃음) 푸리로 일본 공연을 자주 갔었는데 내가 재일이 솔로 할 때 넋 놓고 봤는지 한번은 매니저가 “승석 씨는 재일 씨가 그렇게 좋아요? 침 흘리겠어요” 이랬던 적도 있다. 매번 “이거 이렇게 이렇게 하자” 그러면 그걸 완벽하게 받고 재해석해서 나한테 토스를 해주니까. 이런 동지가 있다는 건 내 복이지 뭐.

음악을 듣다 보면 한승석을 위한 고수 정재일 같은 느낌이 있다. 같은 뮤지션 입장에서 욕심은 없었나.
한승석
: 아니다. 연주자를 위한 소리꾼이다.
정재일: 연주자나 작곡가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그게 영화든 연극이든 연출가를 위한 예술을 한다. 그런 작품을 만들려면 주인공이 누군지를 확실히 알아야 하고, 시작부터 이 음악은 성악이 주제였으니까 거기에 포커스를 최대한 맞춰서 편곡도 간소하게 했다. 연주자나 작곡가가 나대면 안 된다.

그럼 왜 한승석의 소리였나.
한승석
: 선택의 여지가 없지. 푸리에서 나를 만났으니까. (웃음)
정재일: 국악계도 클래식처럼 어릴 때부터 줄곧 해온 사람이 많다. 그런데 승석이 형은 전공자도 아니고 자기가 좋아서 시작한 사람이라 담으려고 하는 얘기도 음악을 대하는 진지함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처음 만났을 때 놀란 지점이기도 한데, 시작이 타악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리듬에 대한 정확도와 느낌이 있다. 그걸로는 독보적일 거다. ‘빨래’에서는 장구를 치면서 소리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형밖에 없죠? (웃음) 게다가 전국의 민요나 진도 씻김굿 같은 선율과 속까지 다 아는 분이니까 판소리만 하는 사람과는 아예 다르고. 그냥 전통예술을 하는 작가인 거다.

국악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 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그 매력을 느꼈나.
정재일
: 중학교 때 원일 감독님을 만나 많은 음악을 들었는데, 그때 전통예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팝음악은 어디 팝음악을 들어도 다 비슷하지만 그곳에만 있는 선율이나 사운드는 전통음악에 다 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 전통음악은 엄청나게 긴 호흡을 가지고 오랫동안 에너지가 차근차근 레이어 쌓이듯 쌓이며 뒤에 가서 폭발하는 희열이 있다. 인도의 라가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런 전통음악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초반에는 오케스트라를 좋아하기도 해서 정악에 관심이 많았고 그러다 각종 성악에 눈을 떴고 그중 백미인 판소리를 좋아하게 됐다.

판소리라고 하면 한자로 된 뜻 모를 말들이 많은데 이번 앨범은 현대어로 되어 있고, ‘빨래’ 같은 곡은 소위 라임이 잘 맞아 귀에 쏙 박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승석
: 배삼식 작가와는 개인적으로 각자 인연이 있는데, 나는 대학교에서 풍물놀이를 하면서 만났고 지금도 같은 학교(중앙대)에서 일하고 있다. 차 타고 갈 때 진도 씻김굿 같은 걸 틀어놓으면 굉장히 심취해서 듣고 있었다는 걸 아니까 (웃음) 우리가 의도하는 걸 빨리 캐치하고 거기에 맞는 텍스트를 줄 것 같았다. 판소리는 정말 무겁고 의젓한 음악인데 노랫말 자체가 아름답고 철학과 관점이 깊었다.
정재일: 연극 작업을 같이 여러 편 했는데, 한글로 이렇게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굉장히 드물다. 글을 우리가 쓰는 게 아닌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한 이상 그 지점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텍스트 쉐잎만 봐도 음악적인 이미지가 그려졌고 전통예술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CD 내지에도 가사가 펼쳐져 있는데 실제로 우리에게 넘어온 가사도 그런 식이었다.

‘빨래’에서는 정재일의 혼신을 담은 바리 연기도 큰 주목을 받았다. (웃음)
한승석
: 그건 내가 연출한 거다. 아니리는 당연히 내가 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 아닌가. 재일 씨 음색이 바리스러워서 (웃음) 바리는 재일이가 해야 될 것 같았어.
정재일: 내가 약간 보노보노 말투라서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 솔로앨범이나 다른 가수랑 하는 프로젝트였다면 내 목소리를 내는 것에 굉장히 두려워했을 거다. 근데 여기는 엄청난 버팀목이 옆에 있으니까 내가 뭘 해도 다 괜찮다.


전통 판소리에 비하면 좀 더 대중적일 수 있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경계한 지점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
한승석
: 대중에게 잘 알려졌다고 생각하는 ‘사랑가’도 보통 사람들이 따라 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이번 작업은 어떤 부분은 따라 할 수도 있고 컬러링으로도 할 수 있고 노래방 가서도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판소리가 극동아시아 작은 나라의 독특한 음악 취급을 받는 건 아니었으면 했다. 그래서 전통 판소리 저 깊은 곳까지 가는 건 장애가 될 것 같아서 최대한 경계했다. 전통이라는 건 늘 ‘전해서 통해야’ 한다.

이번 작업을 통해 판소리의 현대적 가능성을 느끼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한승석
: 판소리는 속에서 끌어올리는 발성의 묘가 있고 파워풀하다. 외국 아티스트들은 판소리를 에너제틱하면서도 파토스가 있다고 한다. 근데 사실 <바리 abandoned> 속 창법은 전통 판소리하고 좀 다르다. 일단 판소리는 굉장히 센 편인데 여기서는 그런 부분을 좀 깎아낸다. 끝에 바이브레이션을 세 번 할 것이냐 다섯 번까지 갈 것이냐, 이런 계산까지 섬세하게 해야 해서 판소리를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 분명히 오리지널리티는 가져야 하지만 시대에 맞는 취향과 소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음악인 판소리와 가장 세계적인 악기인 피아노가 만났는데 전혀 이질감 없이 시너지가 났다는 건 판소리가 가진 보편성이 확인된 거다.
정재일: 이번 음반을 만들면서 서양음악 작곡가이자 연주자로서 어떻게 전통과 소통해야 될지를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음악적으로 붙어서 계속 새로운 곡을 만들다 보면 진짜 하나가 되는 뭔가가 나올 것 같다. 전통이고 서양이고 아무 상관 없는 그냥 좋은 음악.

스스로에게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정재일
: 난 항상 압도당할 때 영감을 받고 감동을 받는다. 그 순간 그 공간에서 청자를 꼼짝 못 하게 하는 것. 내가 만드는 것도 그런 것이 되길 바란다.

작년에 함양군 상림공원을 주제로 한 <상림>의 곡에서 굉장한 공간감이 느껴지는데, 이건 본인의 성향 때문인가 무대음악을 자주 해서인가.
정재일
: 둘 다이긴 한데 전자에 가깝다. 신기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유럽의 고음악을 스웨덴의 침엽수 숲에서 듣는 것과 여기 먼지 가득한 길바닥에서 듣는 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그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공간까지 디자인해줄 수 있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CD보다는 공간 특정적인 부분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된 것 같다.

결국 예술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정서를 표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다음에는 어떤 정서를 만날 수 있을까.
한승석
: 일단은 숙제를 하고 구체적으로 얘기해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섣달 눈이 처음 내리니 사랑스러워 손에 쥐고 싶습니다. 밝은 창가 고요한 책상에 앉아 향을 피우고 책을 보십니까? 딸아이 노는 양을 보십니까? 창가 소나무가지에 채 녹지 않은 눈이 쌓였는데 그대를 생각하다가 그저 좋아서 웃습니다.’ 단원 김홍도가 어떤 선배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내가 너무 감상적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정스러운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이런 작업을 하는 것도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요만큼이라도 이바지하려 해서다.

음악의 힘을 믿는가.
한승석
: 그럼. 음악이 사람을 울리는 게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판소리 계면조에 제대로 잘만 걸리면 많이들 운다. (웃음) 운다는 건 정화된다는 거다. 퍼포먼스가 음악을 덮어 먹는 시대이기도 한데, 마음의 보석상자처럼 영혼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정화시켜주는 그런 음악을 했으면 좋겠다.

장소협조. 야마하 아티스트 서비스│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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