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만나는 나날

2014.07.10
동네 실내사격게임장. 늘 인형쿠폰을 따오지만 아직 상품교환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쌓아만 두고 있다.

“도대체 이 작가는 누구야?” 웹툰 연재기간이 끝나고 휴재를 하는 중엔 수시로 마음이 번잡해진다. 나는 휴재중인데 깜짝 놀랄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들은 매일같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멋진 작가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걸까. 생각해 보면 학생 때에도, 데뷔 준비시기에도, 연재가 시작되고 나서도 많은 웹툰 작가들은 다른 누군가의 멋진 작품들을 보며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 같다. 야, 그 만화 봤어? 어우 끝내주더라. (라고 쓰고 … 젠장이라고 읽는다.)

어린 시절 만화를 처음 그리게 되는 출발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걸작이 주는 감동에 호되게 얻어맞아 따라 그려보기도 하고 단순히 공부가 싫어서 만화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만화가 지망생들은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찬사에서 시작할 것 같다. 어느 날 연습장에, 교과서 귀퉁이에 그린 나의 낙서를 보고 한 친구가 찬사를 보낸다. 시간이 흐르면 반에서, 학교에서 유명한 아이가 되고 친구들은 늘 뭔가를 그려달라고 부탁하게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시작된 만화가로의 길은 대부분 ‘누군가보다 잘 그린다’는 동기에 의해서 지속되기가 쉽다. 이 동기는 강력하고 매력적이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옆 학교의 유명한 아이 소식이 들려오고 인터넷에만 들어가면 괴수 같은 실력의 소위 ‘존잘러’들의 그림을 접하게 된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들의 나이가 몇 살일지 찾아보는 것이다. 만약 나보다 어리거나 비슷한 나이라면 일단 좌절해야 하니까. 운이 좋다면 성장 과정에서 만화를 그리는 동기가 성숙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만화라는 매체 자체의 매력에 경도되기도 하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 중요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보다 잘 그리고 싶다는 호승심은 끊임없이 우리들을 괴롭힌다. 예술의 세계에 승부란 없다는 뻔한 말을 하고 싶진 않다. 마음공부를 열심히 한 누군가에겐 그렇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사바세계의 인간이고 경쟁심은 천연의 욕망이니까. 심리적인 체력이 강한 지망생들은 그런 마음 덕분에 실력이 늘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성이고 우리들 대부분은 멘탈의 지구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 노력의 나날 언저리에서 매일같이 조우하는 누군가의 멋진 그림과 이야기에 좌절을 느끼고 지쳐서 주저 앉아버리기 쉽다.

물론 이런 번뇌의 이유에는 우리들의 본능적인 경쟁심 뿐 아니라 ‘인간을 천천히 이해하기를 게을러 하는’ 교육시스템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 자체로도 상당히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보다 개인적인 고민의 결만 이야기해 보자면, 승부본능을 다스리기도 어렵고 경쟁 시스템을 바꾸는 것도 당장은 요원하다면 그 승부욕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즉, ‘어제의 나보다 잘 그리면 된다’는, 뻔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유용한 마인드셋을 탑재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표방하기 시작하면 누군가 더 잘 그리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자기 자신을 달래기도 쉽고 자기 실력에 부끄러워질 순간에 대인배 코스프레를 하기에도 좋다. 무엇보다 진짜 대인배가 될 때까지의 시간적 여유를 벌수도 있다. 힘들 때 마다 예전 습작이나 데뷔 때의 작품을 들춰보며 “휴우, 이때보다는 훨씬 낫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격장과 전쟁터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사격장에선 옆자리보다 내가 더 잘 쏴야 한다. 하지만 전쟁터에선 그렇지 않다. 만약 내 옆 사람이 명사수라면 나 역시 안전해진다. 취미의 세계가 사격장이라면 직업의 세계는 전쟁터에 더 가깝다. 전체 그림을 보면 멋진 작품과 훌륭한 작가가 늘어날 때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웹툰계 전체가 강력해진다는 뜻이다. 이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작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하지만 명확히, 아마추어 작가가 라이벌과 경쟁하는 동안 프로작가들은 독자와 경쟁한다. 멋진 작품을 본 어느 날, 고통보다 안심이 먼저 느껴진다면 이제 당신도 전업 웹툰 작가라는 장거리 레이스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이종범
<닥터 프로스트> 작가로 일 벌이길 좋아하는 참치형 만화가.
덕력과 잉여력의 위대함을 신봉하지만 정작 본인은 마감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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