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정현민 작가 “정치는 나쁜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2014.07.07
“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네.” KBS <정도전>에서 이방원(안재모)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정도전(조재현)은 지기인 정몽주(임호)의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정도전의 마지막 고백과 눈물은 드라마가 50회에 걸쳐 해온 치열한 고민의 종지부이기도 하다. 정도전이 민본의 나라를 만들겠다 마음먹고 대업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 드라마는 그의 삶을 따라가며 좋은 정치란 무엇인지 그리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끈질기게 보여줬다. 다양한 정치관이 충돌하는 순간과 핵심을 찌르는 응축된 대사는 단순히 과거의 한 시대를 엿보는 것을 넘어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정치와 이상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했다. 주말 동시간대 시청률 1위, 정통사극의 부활과 같은 화려한 수식어보다 <정도전>이 남긴 가장 중요한 울림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6개월의 긴 여정을 통해 정치를 냉철하게 들여다보되 그에 대한 희망은 놓지 않았던 정현민 작가를 만났다.

마지막 회에서 정도전의 시체는 산에 아무렇지 않게 버려진 반면 그의 영혼은 정몽주에게 “할 만큼 했다”는 위로를 받았다. 정도전의 최후에 어떤 의미를 담고 싶었나.
정현민
: 정도전은 정점에 올랐을 때 살해당했지만, 그 전까지 남긴 업적만으로도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다. 이성계가 일을 누군가에게 믿고 맡기는 왕이었다면, 정도전은 그런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헌신할 줄 아는 기획형 정치가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정도전은 참 똑똑하면서 부지런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비록 왕이 아닌 참모였지만. 

정도전은 왜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던 걸까. 이성계처럼 무력이 없어서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 
정현민
: 작업을 하면서 그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해답은 이거였다. 아, 이 사람은 재상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던 거구나. 정도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라는 중국의 주나라고, 명재상이 되는 게 그의 최고 가치였던 거다. 정도전이 실권을 얼마큼 가지려 했느냐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있는데, 그걸 떠나 난 정도전의 두 가지 면에서 위대함을 봤다. 헌신과 콘텐츠. 콘텐츠 없이 헌신만 하면 그것만큼 맥 빠지는 게 없고 반대로 콘텐츠를 갖고 있으면서 게으르다든지 사리사욕만 챙기면 안 되는데, 정도전은 사생활도 깨끗했다. 물론 청렴한 정치인들은 많았겠지만 정도전이 특별했던 건, 원칙을 지키면서도 성리학이라는 이념을 국가에 대한 콘텐츠까지 현실화시킨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작발표회 때부터 실천하는 정치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실천도 단순히 노력하는 것 이상을 의미했던 건가. 
정현민
: 지금 정치를 하시는 분들도 다 노력은 한다. 다만 국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실천은 조금 부족한 것 같다. 그리고 단순히 실천하는 것보다 결국 그 사람이 실천하려는 가치가 뭔지, 그게 가장 중요하다. 정도전에게는 그게 고려를 멸망시키고 민본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거였다.

정도전이 실현한 핵심 콘텐츠는 왕이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중심정치다. 하지만 정작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은 자신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행동하는 정치인으로 묘사됐다. 
정현민
: 이 드라마를 준비하며 어설프게 공부한 결과, 그래도 임금 한 명이 다스리는 것보다는 재상중심정치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상은 결국 과거를 통과한 후 말단부터 차근차근 위로 올라간 사람이다. 과거에 붙을 정도로 유학에 통달하고 그렇게 다양하게 쌓은 경륜까지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 정도전의 그런 철학을 굉장히 지지한다. 다만 정도전은 저항에 부딪쳤을 때 정치력을 갖고 설득하기보다 돌파해나간 사람이었던 거다. 철저히 사료를 보고 정도전의 캐릭터를 구축했는데 <삼봉집>을 보면 ‘나는 성격이 모가 났다’는 말이 나온다. 개국 공신들과 달리 정도전은 조선 개국이 시작이라고 볼 정도로 앞서 갔지만 분명 부족한 점도 있는 사람이었던 거지. 그런 사람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개혁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는 점이 내게 큰 울림을 줬던 것 같다. 그리고 다소 앞서가는 사람들은 늘 외로운 법이기도 하고. (웃음)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인물 같기도 하다. 
정현민
: 그래서 실제로 내정 수반은 조준(전현)에게 맡기지 않았나. 정도전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완벽하지도 않다. 거기에서 페이소스가 생긴다고 봤다. 정도전은 정몽주만 있었다면 자신은 뒤로 빠져 기획만 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결국 개혁이라는 것은 기득권과의 싸움이다. 당연히 상대하기 쉽지 않은 적이지. 그런 싸움을 할 때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거나 만인의 칭송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은 욕심일 수 있다. 정치를 한다는 게 또 다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드라마에서 정치가들은 현자도, 괴물도 될 수 없는 사람들로 표현된 건가. 권문세가의 이인임(박영규)은 물론 충신인 정몽주까지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정현민
: 정치를 냉정하게 보는 편이다. 좋은 정치가 뭐냐 했을 때 무조건 착한 사람이 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도 정치를 선악의 잣대로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노선과 노선의 대립으로 보여주고 판단은 보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었던 거지. 정치 드라마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이인임도 부패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국가관이 있었고, 요동 정벌을 두고 조준과 정도전이 대립하는 장면이 나왔지만 그건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안에 따라 얼마든지 가치가 부딪칠 수 있는 게 정치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저놈 나쁜 놈 같은데 어라? 하는 말은 맞네. 보는 분들이 이렇게 생각해주길 바라고 썼다.

극 중 여러 정치관이 충돌하기도 했지만 정치인 각각의 내면도 서정적으로 묘사했다.
정현민
: 극 중에서 정도전이 죽기 전에 정몽주의 무덤 앞에서 우는 장면이 나온다. 겉으로 센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되게 힘들었던 거지. 그들도 결국은 평범한 사람이다. 편하게 살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으니까. 난 슈퍼 히어로보다 그런 사람들이 더 위대하다고 본다. 원래 안티 히어로 성향도 있고. 더구나 드라마 주인공으로 영웅을 그리는 건 재미가 없다. 유전자부터 나랑 다른 사람을 보면 공허하지 않나? 결국은 저 사람도 사람이구나. 거기에서 공감이 생기는 거다. 정도전의 마지막 연설에도 나왔듯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꿈을 갖자는 거였는데, 너무 위대한 사람을 그리면서 저렇게 되자고 하는 건 어폐가 있다.


정도전은 마지막 연설에서 꿈 중에서도 불가능할 것 같은 꿈을 갖자고 했는데, 그렇게 큰 꿈을 강조한 이유는 뭐였나. 
정현민
: 원대한 꿈을 말한 건 아니었다. 정도전에게는 나라를 바꾸려는 대업이 꿈이었지만, 한 직장인이 어느 날부터 밤에 학원에 나가기로 한 것도 혹은 9급 공무원이 되자고 마음먹은 것도 엄청나게 큰 꿈이다. 다만 나는 여기까지라고 포기하거나 일상에만 갇히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남들이 볼 때는 쓸데없어 보일지 몰라도 공고한 일상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가. 냉엄한 현실 속에서 엄청난 꿈을 꾸라는 건 사기지만, 약간은 안 해본 걸 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용기를 갖는 게 어떨까 싶었다. 

변화를 시도하면 뭔가 바뀔 거라는 믿음이 있나. 
정현민
: 내가 다분히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웃음) 예전에 다른 사람들이 한 만큼 노동 관련 활동을 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주변 사람들을 보면 혁명가들, 이상주의자들이 많다. 그들의 공통점은 지금보다 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뭔가를 바꾸려는 사람들인 거지. 이 드라마를 준비하면서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세상이나 인간관계를 좀 더 이상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물론 절망하기 쉬운 세상이지만, 이 드라마를 보신 분들이 각자의 대업을 찾길 바랐고 일상 속 작은 변화를 꾀하는 것도 대업이라고 봤다. 대업을 위한 용기를 내는 게 절망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을 하다가, 마흔 살에 드라마 작가가 되기로 한 것도 그런 용기의 결과였나. 
정현민
: 그렇지. 간절하게 드라마 작가를 꿈꾼 건 아니지만 일상의 변화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때마침 친구가 그러더라. 남자 나이 40이면 새로운 꿈을 갖기 어렵다고. 물론 쉽지 않았다. 국회에서 횡단보도 하나 건너면 작가 교육원이 있었는데, 그 횡단보도 하나 건너는 데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하던지.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전부 다 여자고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순간 ‘내가 여기 왜 왔지?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재미있을 거 같긴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수 있는데 결국 작가가 됐다. 원래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임하는 편인가.
정현민
: 적극적이고, 승부욕도 강하고 긍정적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다 잘되게 돼 있다’다. 그렇게 생각하니 진짜 잘되더라. 안 되면 다음에 되겠지 했고. 물론 몇 년 동안은 ‘아, 왜 이렇게 인생이 안 풀리지?’라며 우울해하기도 했다. 소위 지방대를 나왔고 심지어 공고 출신에 집도 정말 가난했다. 국회는 철저히 능력으로 승부하는 곳이라, 국회에 들어가서 다행히 그런 콤플렉스가 없어지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웬만하면 잘하는 거에 집중해왔다. 날 과대평가하지 않되 잘할 수 있는 거에는 대단히 자신감 있게 뛰어들고 자신 없으면 잘 안 한다. 그래서 안 해본 게 많다. 조기 축구회 같은. (웃음) 드라마 작가는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 같진 않았다.

이유가 있었나. 보좌관으로 일할 때 실제 한 드라마 작가에게 이야기꾼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알고 있다.
정현민
: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내 의견을 조리 있게 전달하는 걸 좋아했다. 국회에서 세련된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난 대단히 가벼운 사람인데, 워낙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 (웃음) 공장 다닐 때 만난 친구들부터 국회의원들까지, 만나서 수다 떠는 사람이 다양하고 소재도 가리지 않는다. 폭력보다 말이 아름다운 거라 생각해서 그런지 수다 떠는 거 자체를 즐긴다. 그래서 문자 보내는 것도 굉장히 귀찮아하고 SNS는 절대 안 한다.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고 아이콘택트도 해야 정서까지 전달되지 않을까. 요즘에는 체력이 떨어져서 수다를 떨면 머리가 아프지만 생각보다 시청률이 잘 나와서 그런지 이번 드라마로 오랜만에 연락이 된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과 또 수다를 떨게 될 것 같다. (웃음)

정치 이야기를 드라마로 풀어보니 어떻던가. 정통 사극처럼 작가의 상상력을 많이 발휘할 수 없는 장르에서 극성을 주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정현민
: 작가적 능력을 타고난 게 아니라 그 고민을 많이 했다. 지금까지 했던 드라마를 통해 나름대로 배웠고 역사 공부한 걸 정리한 것뿐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 그래도 사료에 충실하겠다는 목표는 채웠다. 시청자들에게 좋은 자극을 주고 싶다는 희망도 어느 정도 이룬 것 같고.

좋은 자극? 
정현민
: 원래 드라마 제목을 아예 <도전>으로 하려고 했는데 감독님이 반대하셨다. 그때의 도전은 정도전의 도전이 아니라 ‘challenge’다. 물론 보좌관을 업으로 삼았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정치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드라마에는 판타지를 넣고 싶었다. 정치는 대단히 복잡한 거니까 이분법적으로 누구의 편을 들지 않고 냉철하게 보되 긍정적인 메시지를 넣고 싶었던 거다. 좀 오그라들더라도 말이다. 특히 공영방송의 드라마는 국민의 수신료로 만들어지는 거니까 그런 메시지가 더 필요하다고 봤다.

정치에 대한 믿음이나 희망을 직접적으로 강조한 것도 그래서였나. 극 중에서 정몽주는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사람들이 기댈 만한 것은 정치”라고 했다.
정현민
: 정치는 나쁜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다 욕망이 있지 않나. 자고 싶고 먹고 싶고 더 많은 걸 갖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인데 무방비로 풀어놓으면 전쟁이 시작된다. 어느 정치학자의 말처럼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게 정치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게 정치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지만 없는 것보다 나으니 좀 더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게 낫다고 보는 거다. 

다음 작품에서도 정치에 대해 말하고 싶나. 
정현민
: 1970, 80년대 시대극이나 정치를 정면으로 다룬 미드 풍의 장르물을 써보고 싶다. 사실 꼭 정치만 다루고 싶은 건 아닌데, 내가 비교적 많이 한 경험을 살려서 남들보다 잘 쓸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 할 것 같다. 로맨틱 코미디나 다른 장르는 이미 잘하고 계신 분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정치를 정면으로 다룬 장르물은 아직까지 한국에서 많이 안 나온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기획 단계에서부터 정치 관련 전문가들을 자문으로 모셔서 치밀하게 해보고 싶다. 

국회의원 보좌관과 드라마 작가 외에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고 노동이란 단어를 오랫동안 화두로 삼아왔다고 들었다. 드라마 작가란, 또는 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 
정현민
: 지금까지 3개월 이상 했던 직업을 세어 보면 13개 정도가 된다. 대학교에 가기 전에도 5번 정도 직장을 옮겼고, 소위 말하는 노가다도 했고, 장난감 만드는 곳에서도 일했다. 그래서 고용이 불안한 상황에 굉장히 익숙하다. 안정적인 직업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은 지금도 원한다. (웃음) 하지만 이상하게 난 늘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직업을 택해왔던 것 같다. 노동 활동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지만 난 일을 하고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걸 알았다. 결국 직업은 그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만드는 것이면서도 가장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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