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재 “평등하게 사람들을 웃길 수 있어 코미디가 좋다”

2014.07.04
tvN < SNL 코리아 > ‘극한직업’에는 불멸의 매니저가 있다. 까다롭고 겉과 속이 다른 스타를 보필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이유 없이 뺨을 맞고 억울함 가득한 눈동자로 돌아보는 이 남자는 사실 이 코너의 작가 유병재다. 친구들을 모아 UCC를 만들던 대학생에서 Mnet <유세윤의 아트 비디오> 유세윤의 조수로, < SNL 코리아 >의 작가 겸 연기자로 자리를 옮기는 내내 그는 진지하고 집요하게 사람들을 웃겨왔다. 툭 던진 것 같지만 폭소를 유발하거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드는 글이 올라오는 그의 페이스북은 팔로워 7만 명을 훌쩍 넘겼고, ‘아홉시반 주립대학’ 사이트의 예능학부 교수가 된 그는 다음과 같은 명강의를 남겼다. “요즘 애들은 잘 모르겠지만 옛날엔 꼰대들 진짜 많았다.” 몸으로 머리로 방송으로 SNS로, 그리고 말과 글로 쉬지 않고 누군가를 웃기고 싶어 하는 유병재 작가를 만났다. 그가 웃지도 않고 털어놓은, 수많은 웃긴 아이디어들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아쉽지만 생략한다.

‘극한직업’은 어떻게 만들어진 코너인가.
유병재
: EBS <극한직업>의 제목에 먼저 끌렸는데, 알고 보니 진짜 힘든 직업의 세계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 SNL 코리아 >에서는 매니저가 연예인에게 구박당하는 상황을 보여주면 재밌을 것 같고, 호스트의 캐릭터 살리기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직접 출연하려고 낸 아이템은 아니다. 회의를 하던 중 한 PD님이 아무래도 얼굴 다 알려진 배우가 하면 리얼리티나 건조한 느낌이 덜할 것 같다고 나를 추천하셨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연기도 잠깐 해봤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좀 이상한 애가 하는 게 더 웃길 수도 있다고 보신 것 같다.

대본도 쓰고 연기도 하면 출연료를 따로 받나?
유병재
: 원래는 안 받았는데 요새는 조금씩 챙겨주신다. 그렇다고 내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다.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호스트가 매니저 구박하는 ‘진상’ 스타를 연기해야 하는데, 설정에 대해 양해를 구하나.
유병재
: 사전 미팅에서 얘기를 나누는데, 직접 아이디어를 주시는 호스트도 있다. 조성모 씨는 JTBC <히든 싱어>에서 일찍 탈락했던 에피소드를 가지고 “우승자한테 노래를 배운다고 하면 어떻겠냐”는 설정을 제안하셨다. 그렇게 먼저 자기를 깎아내리면서 웃길 수 있는 아이디어를 주면 참 고맙다.

스타가 매니저를 괴롭히는 게 한 패턴이 아니라 각자 다른 스타일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유병재
: ‘극한직업’을 여러 번 하다 보니 캐릭터를 정해놓고 가는 게 전체 이야기를 만들 때 도움이 된다. 주병진 아저씨는 ‘꼰대’, DJ DOC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못된 형들’이었다. 조성모 씨에게는 요즘 짜증 나는 여자친구의 상용구처럼 알려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라는 대사랑 변덕스러운 여배우 캐릭터를 맡겼는데 스스로 즐기면서 연기를 정말 잘해주셨다. 


매회 호스트에게 뺨을 맞는데, 맞는 것 자체보다 그다음 순간의 복잡한 표정이나 시선 교환 등 호흡이 강조되면서 웃음이 터진다.
유병재
: 여백이나 침묵을 통한 웃음 코드를 좋아한다. 코미디언이 한 대 맞고 과장된 표정으로 ‘띠용~’ 같은 효과음 내는 것보다 가만히 있을 때 더 웃기다고 생각한다. 내 성향도, 영향받은 코미디의 스타일도 그렇다. 일본 코미디언 중 ‘슬림 클럽’이라는 만담가들이 있다. 만담은 호흡이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5초에 한 번씩 웃겨야 할 정도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호흡도 느리고 아주 천천히 코미디를 하는데도 빵빵 터진다. 물론 까불면서 웃기는 걸 잘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그러지 못하니까 조용조용하게 웃기는 게 좋다.

아이디어부터 연출까지 좋아하는 코드대로 할 수 있었던 UCC 시절과 달리 < SNL 코리아 >는 조직 안에서 여러 사람과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작업인데, 일하기에는 어떤가.
유병재
: 코미디는 완전히 주관적인 영역이라 내가 이게 재밌다고 생각하면 남이 아니라고 해도 타협이나 조율이 힘들다는 점에서 어렵다. 그래서 < SNL 코리아 >에 처음 왔을 때는 ‘나는 예술로 코미디를 하고 싶은데 아이디어 검사받는 게 무슨 예술이야? 남은 안 웃어도 돼. 나만 만족하면 돼’ 같은 치기 어린 생각도 했다. 그런데 계속 하다 보니 이렇게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발전시키는 게 고맙고 좋은 시스템 같다.

공동 작업을 통해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재미를 느낄 때도 있나.
유병재
: 김광규 아저씨가 머리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책받침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르다가 다 같이 “섰다~!!” 하고 좋아하는 콩트가 있었다. 생방송이라 화면에 잘 보이게 해야 하니까 대기실에서 미리 빵 봉지로도 문질러보고 파일로도 문질러보고 난리였다. 40~50대 아저씨들이 계속 급하게 딴 거 갖고 와보라고 하고, 객관적으로 보면 웃긴 상황인데 아무도 안 웃고 심각하게 몰입한다. 그런 게 크고 작은 재미다.

요즘 ‘아홉시반 주립대학’ 사이트에 ‘술자리 농담이나 ‘꼰대 언어’ 등을 분석한 글을 연재하는데, 말에 담겨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날카롭게 잡아내는 것 같다.
유병재
: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주변에 우스운 애가 하나 있으면 말투나 행동, 자주 쓰는 어구를 적어놓고 분석하면서 혼자 만족하고 그랬다. 예를 들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라는 말에 숨은 뜻은 “니 말은 다 알겠는데 이제 내가 얼마나 잘 비꼬는지 봐라”라는 거 아닌가. 페이스북에서도 게임이나 연애에 대한 말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가끔 하는데, 한편으로 “뭐는 뭐다” 식의 정리가 좀 위험하다는 생각도 한다. 지나친 비약이 될 수 있어서 고민이다.

그런 고민과 사람들을 웃기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정하는 게 어렵지 않나.
유병재
: 웃기는 게 정말 어려운 건, 재미가 있고 없고보다도 한쪽 면이 ‘양아치’랑 맞닿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를 심하게 비하하면서 재밌어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못 했던 이야기를 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그냥 반칙일 뿐이다. 전에는 나도 무심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방식으로 남들을 웃긴 적이 있는데 일을 하면서 그게 옳지 못하다는 것을 계속 깨닫고 있다. 그래서 창작물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조심하려고 노력한다.


기본적으로 애착을 갖는 웃음 코드는 어떤 건가.
유병재
: 내 인생이 그래서 그런지 ‘호구’ 감성,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너드’같은 인기 없는 남자의 감성을 좋아한다. 예면, 멀끔하게 양복 차려입은 남자들이 세미나 같은 데 모여 앉아서 “섹스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는 식이다. 동정남들에겐 그게 전설 속의 용 같은 존재라는 설정인 거지.

비교적 유명인이 된 요즘도 자신이 인기 없는 남자인 것 같나.
유병재
: 솔직히 요즘에는 조금 생긴 것 같다. 방송에 얼굴도 팔리고 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가지고 있는 매력치 안에서도 결실이 없는 타입 같다. ‘요 정도’는 누릴 수 있다고 칠 때 성격상 그보다 훨씬 움츠러들어 있고, 그런데 일단 누릴 수 있는 것 자체가 크지도 않기 때문에… 주로 짝사랑을 많이 한다. 고백도 못 하고.

하지만 페이스북에서는 정말 인기가 많다. 지난 5월 생일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축하 ‘짤방’을 올려줬던데.
유병재
: 나 같은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준다는 게 꿈 같고 고맙다. 어릴 때 학급이 하나뿐인 시골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나랑 생일이 똑같은 애가 있었다. 애들이 생일날 대부분 인기 많은 걔네 집으로 갔는데 (책상을 탕 치며) 지금은 역전된 것 같아서 좋다.

방송으로 시청자를 웃기는 것과 페이스북에 쓴 글로 팔로워들을 웃기는 쾌감은 비슷할까.
유병재
: 감각적으로는 웃음소리가 직접 들리는 게 좋긴 한데, 댓글의 “ㅋㅋㅋㅋㅋ”도 버금가게 좋다. 내가 생각한 포인트를 알아채 주면 기쁘니까 좀 더 알토란같은 글을 올려야겠다고 혼자 고민한다. 누가 ‘좋아요’ 눌러주면 ‘나 좋아하나 봐’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아닌데.

보상을 떠나 남을 웃기는 행위 자체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 같다.
유병재
: 다른 일을 해서 인정받으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사람을 웃기면 1초도 안 돼서 보상이 돌아온다. 사실 나는 점수 맞춰서 대학교 지원하고, 누나가 시킨 대로 신문방송학과에 가서도 진짜 의미 없이 살았다. 07학번인데 MBC <무한도전>이나 <황금어장>이 한창 인기 있을 때라 ‘와, 예능 PD 같은 것도 재밌겠다’고 생각했지만 학점이 2점대다 보니 꿈도 못 꾸고 학교 끝나면 집에 와서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그런데 군대 다녀온 뒤로는 더 이상 유예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예 바닥을 찍고 나면 도약할 수도 있는 것 같다. 해놓은 게 없으니까 하고 싶은 게 생겼다. 난 어릴 때부터 사람 웃기는 걸 좋아해서 개그맨 해보라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왜 이 좋은 걸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어떤 면에서 코미디가 그토록 좋은가.
유병재
: 누군가의 공감을 얻고 내가 설득했다는, 유치하게 표현하면 ‘내 편’이라는 확인이 웃음이라는 좋은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면에서 민주적인 것 같다. 내가 잘생겨서 사람들이 많이 웃어주는 것도 아니고, 물론 잘생긴 사람에게 많이 웃어주는 경우도 있지만. 키도 작고 얼굴도 큰 나 같은 사람이 평등하게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는 게 좋다.

인터뷰에서 “청춘은 졸라 좋은 것이니 늙기 전에 왕창 즐겨 먹어야겠다”(<고함 20>)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즐겁게 살고 있나.
유병재
: 나는 또래들에 비해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게 일치하기는 정말 어려운 건데 운이 좋았다. 그래서 일하는 것도 즐겁고 쉴 때는 더 즐겁다. 사랑은 잘 못 하고 있지만, 어쨌든 젊게 살다가 죽고 싶다. 꼰대만 되지 말아야지. 하지만 너무 ‘꼰대가 되지 말아야지’ 하다가 결국 꼰대를 싫어하는 꼰대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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