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안판석 감독 “중요한 건 인간을 의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

2014.06.05
안판석 감독을 만났다. JTBC <밀회>에 대해 묻기 전, 그가 먼저 물었다. “테두리를 벗어나는 게 불안해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인간은 영원히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요?”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특별한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는 대답에, 그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몇 차례 문답이 오간 뒤 안판석 감독이 말했다. “<밀회>는 한 마디로, 거기서 벗어나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에요. 오혜원(김희애)이 나이 사십에, 내가 어디 서 있는지 내가 문제인지 사회가 문제인지 사회가 문제라면 나는 얼마나 공범 노릇을 했는지 깨닫게 되죠. 그걸 박차고 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채로 체념하고 산다는 건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일인가, 그러니 보는 사람에게도 그걸 박차고 나가겠다는 희망 혹은 추동력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오혜원에게는 이선재(유아인)가 바로 그 어마어마한 계기인 거죠.”<밀회>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우리가 탐구한 것은 21세기 한국에서 드라마를 만드는 인본주의자로서 안판석이라는 한 인간이었다.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TV 부문 연출상을 받고 지극히 간략한 소감을 말씀하셨는데, 다시 한 번 어떠셨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안판석
: 일단 상을 준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나죠. 알아주니 고맙기도 하지만 원래는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무대 위에 올라가 받아야 하는 게 편치 않거든요. 사실, 결과물에 대해서는 아무 칭찬도 비판도 소용없어요. 해놓고 좀 지나 보면 내가 알거든. 잘 했는지 못 했는지. 그래서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은데 칭찬 받으면 굉장한 자기모멸에 빠져요. 결국은 내가 만족스러워야 하죠.

반면 정성주 작가의 극본상을 대리 수상하며 “좋은 글은 단어의 배열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밀회> 대본이 꼭 그랬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데서는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안판석
: 작년 6월, 정성주 선생이랑 김희애 씨랑 셋이 만났을 때 <밀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해 봅시다” 그랬어요. 장황한 설명 없이도 이 드라마의 주제에 공감했던 것 같아요. 정 선생의 글은 기획 의도나 시놉시스 한 줄만 써도 다 들어가 있어요. 명제 하나를 보고 있으면 서사 덩어리도 떠오르고 주제도 떠오르고 인물도 형체감이 생겨나 있고 심지어 대사도 떠올라요. 남이 열 줄 써야 표현 가능한 걸 한 줄로 쓸 수 있는, 기가 막히게 잘 쓰는 사람이에요. 성품이 대단히 고결한 사람이기도 하죠.

MBC <장미와 콩나물>(1999)을 시작으로 15년에 걸쳐 <아줌마>(2000), JTBC <아내의 자격>(2012), <밀회>를 함께 해오셨는데, 두 분의 호흡은 어떠신가요?
안판석
: 정 선생과는 세상을 보는 눈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껴요. 변했다면 아마 세월의 흐름 따라 동시에 변해 갔을 거예요. 심지어 어떤 신에 대한 얘기를 하며 각자 머릿속으로 공간과 인물의 움직임을 그릴 때도 같다고 봐요. <밀회>에서도 어느 회엔가 편집실에 와서 촬영분을 보신 정 선생이 “대본을 쓸 때 머리로 그린 것과 똑같다”고 하셨는데, 그러리라 믿어요.

‘고결한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함께 일하는 데 있어 능력만큼이나 성품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안판석
: 물론이죠. 정 선생은 아마 그렇게 말한 걸 알면 날 죽이려고 들 거예요. (웃음) 남에게 지나친 칭송을 받거나 자신이 밖으로 자꾸 드러나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정 선생이 <장미와 콩나물>부터 <밀회>까지 작품에서 계속 놀려먹는 타입의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 헛된 공명심을 가진 사람들이죠. 신문에서건 TV에서건 그런 사람의 행위를 포착하면 그걸 각인시켰다 글로 쓰는 사람이니, 본인이 그 지경에 있다고 상상만 해도 견디지 못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성품과 능력은 같이 가는 거라고 봐요. 

다만 그 사람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남달랐던 것뿐이라고 보시는 건가요?
안판석
베토벤은 괴팍했는데 음악만 아름다웠다는 얘기도 있지만, 나는 그가 인품도 훌륭하고 사고도 깊은 인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없었겠죠. 아주 섬세한 예술가들 중에는 너무도 예민해서, ‘사짜’를 잘 못 견디거나 재수 없는 인간과 앉아 있는 걸 정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들의 얼굴에서 불쾌감을 목격한 누군가는 밖에 나와 그 사람을 씹겠지. 일면만 보고 ‘막 산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지난 넉 달 간 같이 일하면서 겪어 본 바로는 유아인도 그런 타입 같아요.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 머리로 사고하고 자기 입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아주 섬세하고 맑은 영혼인데 까칠하다거나 튄다는 얘기도 더러 듣죠. 하지만 개의치 않고 자기 길을 걸어가는 걸 보면 훌륭한 젊은이다 싶어요.


87년 MBC에 입사하며 감독으로 첫 발을 내딛으셨는데, 출발 당시는 어떠셨나요. 
안판석
: 당시 문과생들은 9월 <한국일보>를 시작으로 언론사 시험 거치고 삼성, 현대 순서로 지원했는데 제일 먼저 붙은 데가 MBC였어요. 예술도 공부하고 단편영화도 찍어봤으니 기왕 그런 일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감독으로 평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이 막연했는데, 드라마 파트에 배정되고 보니 이 일이 요구하는 가장 큰 학문적 배경이 문학이더라고요. 사실 나는 영상으로 사고하는 씨네 키드는 아니고, 사춘기 시절 어쭙잖은 문학 소년이어서 이것저것 뒤적거렸던 게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영화, 드라마가 나오면서 문학의 시대가 가고 영상의 시대가 왔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게 아니라 여전히 문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거라고 봐요. 시, 소설, 연극 뿐 아니라 영화도, 드라마도 문학의 아들인 거죠.

70년대의 문학 소년이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궁금합니다.
안판석
: 고1 때 사춘기를 세게 겪으면서 다들 그랬듯 인생에 대해 고뇌하고 막연하게 질풍노도의 시기가 왔어요. 공부를 작파하고 밤에는 책 보고 딴 생각하느라 학교에서 매일 자고, 자다 깨서 잠깐씩 수업 들은 게 고등학교 공부의 전부였어요. 졸업한 뒤에는 대학교 들어갈 친구들과 학원가서 재수할 친구들,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나는 그냥 막막했어요.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불태워야 하는데 어디도 끼지 못했으니까. 재수할 때는 남산도서관에 다녔어요. 역시 타고나길 성실하지 못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열한시쯤 가면 자리가 없어서 대기표를 받고 기다렸죠. 시계탑 앞 벤치에 앉아 있다가 지겨워지면 저쪽 벤치에 갔다가, 오후 세 시쯤 입장 가능해져서 들어가 책을 펴면 공부가 되나? 조금 있으면 또 도서관은 문을 닫죠. 그럼 집에 가면서 내 인생은 뭔가, 기가 찼어요. (웃음) 하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았어요. 이러고 있으면서 입시 준비하는 척 하다가 안 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게 되면 골방에 앉아서 소설을 쓰지, 그거 참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으면 뿌듯하기도 하고 정말 기뻤어요.

좋은 점수를 받아 일류 대학에 들어가는 걸 일생일대의 과제로 여기는 사회에서, 그것도 집안의 기대가 컸을 외아들이 성적에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한데요.
안판석
: 첫째, 공부와 너무 멀어져 있다 보니 따라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 저절로 포기하게 된 것도 있어요. 그리고 당시는 유신독재 시절이라 정치, 경제, 윤리 교과서를 보면 기분 나쁜 대목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걸 읽고 외우고 가서 답을 맞혀야 한다는 게 불쾌했어요. 둘째, 좋은 책을 읽음으로써 묘한 쾌감을 체험하고 나면 더 좋은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언제부터 현실에 대해 ‘왜 세상이 이 모양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셨나요?
안판석
: 누나가 네 명이라 어릴 때부터 친구보다 누나들과 노는 일이 많았어요. 팝송도 누나들이 듣는 걸 들었고, 신문 배달 오면 다들 달려들어 보니까 ‘저게 좋은 거구나’ 하고 읽기 시작했지. 초등학교 3학년 때 스포츠 면부터 시작해 다른 면도 다 보게 됐어요. 당시는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교묘하게 행간에 의미를 담아 전달하는 좋은 기자들이 많았거든요. 그런 걸 발견하면 어린 나이에도 가슴이 뭉클했죠. 그러다보니 6학년쯤 됐을 땐 세상이 X같다고 느끼게 된 거죠. (웃음) 정치적 가치관은 그 때부터 흔들림 없이 형성된 것 같아요.

문자를 통해 사고하는 습관이 작품을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나요.
안판석
 책을 읽는다는 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고를 단련하는 거예요.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기 위해 손 근육을 단련하는 것처럼 작가, 연출가는 책을 읽으며 정신의 근육을 단련하는 거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머릿속으로 사고력을 단련해야 해요. 

그렇게 단련된 사고력이 실제 연출에 있어 어떻게 적용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안판: 텍스트를 볼 때, 예를 들어 <죄와 벌>이라면 책장을 넘겼을 때 라스콜리니코프가 하숙방에서 주인의 눈을 피해 내려오는 걸 머릿속에서 보거든요. 모든 사람이 다 다르게 보고, 모든 감독이 다 다른 시선을 갖는데 그 시선을 가지고 카메라 앵글을 잡아 찍는 거예요. 자신의 시선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루 24시간을 나눠 쓴다면 비디오 보기보다 책 읽기를, 책 읽기보다는 생각하기를 더 하는 게 좋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내 진짜 직업은 ‘싱커(thinker)’인데 드라마는 그 과정에서 덤으로 나오는 거죠. 


“작품에는 ‘명(名)신’이나 ‘망한 신’이 있으면 안 되고, 모든 신이 다 괜찮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좋은 연출은 ‘좋다’는 것조차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안판석
: 스타일이라는 건 작품의 민망한 부분이에요. 더 숨어야 하고, 한 작품씩 할수록 전작보다 잘 숨을 수 있는 재주를 조금씩 익히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텍스트가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에 무조건 숨는다고 능사가 아니라 연출이 텍스트의 어색한 부분을 숨겨야 할 때도 있어요. 리히터가 말하길 “피아니스트는 악보를 반사하는 거울”이라고 했죠. 이처럼 연출은 텍스트를 반사하는 거울이어야 하고, 텍스트에 잘못된 부분이 있을 땐 거울에 살짝 얼룩을 묻혀서 가려줘야 해요. 드라마는 공동 작업이니까 감독, 작가, 배우, 소품, 카메라, 조명 등 모두가 합심해서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는 거죠.

한국 드라마 제작 환경은 상시적 과로와 철야로 악명 높은데, <맥스무비>와의 인터뷰에서 <밀회>의 스태프들에게 “철저하게 쉴 시간, 잘 시간, 씻을 시간, 노닥거릴 시간을 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판: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1년 내내 촬영장에서 하루를 보내요. 사람들의 인생이 거기에 있으니까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샤워도 하고 노닥거리기도 하는 일상의 행복이 거기서 이루어져야죠. 촬영은 누군가한테는 특수한 행위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스태프들에겐 일상이거든요. 촬영장을 학교라 치면 반 아이들이 모여서 공부도 하고 ‘노가리’도 까고 연애도 하다가 작품은 덤으로 나오는 거죠. 드라마 한다고 집에도 못 가고 숙소도 안 가고 버스에서 살다시피 하며 무박 80일로 사는 건 고쳐야 해요. 기자들도 어떤 드라마 대박 났다고 칭찬할 게 아니라 문제를 자꾸 찾아내고 고쳐야지, “링거 투혼”이니 뭐니 추켜세울 일이 아니에요. 내가 잘 했다고 칭찬받을 건 아니에요. 이게 당연한 게 되어야 하는 거죠. 

그 당연한 원칙이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판석: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 이번 건은 반드시 성공하려 하기 때문이에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 3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죠. 반드시 이번 시험은 잘 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오혜원은 구두도 안 벗고 잠을 청하잖아요. 잠도 안자고 목숨을 걸고 열심히 어떻게든 무가치해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 와중에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영혼은 없어져 버려요. 인간이 언제부터 그렇게 되는지, 헤어 나올 수는 있는 건지. 그게 내 평생의 테마에요. 

그런 삶을 바라볼 때 슬픔과 분노, 어느 쪽을 더 크게 느끼시나요?
안판석
: 슬픔이 더 커요. 연민이 느껴지죠. 같이 살아가는 존재니까요. 인간의 본질은 카페에서, 칼국수 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럴 때는 다 똑똑하고 인간 같아요. 그런데 어떤 예민한 분기점이 있을 때 ‘와, 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단 말이야?’ 하고 느끼면 슬퍼요. 함께 밥을 먹고 몸을 맞대고 살아왔는데, 분노도 일지만 같이 해왔던 시간을 생각하면 슬픈 마음이 들죠. 드라마나 연극도, 보는 사람들이 등장인물의 인생 전반에 연민을 느껴야 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이 감정을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고 했는데, 그게 드라마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자꾸 씻어내면 사람이 착해지니까.

김윤철 감독이 번역한 <스토리텔링의 비밀: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의 추천사에 “대본이 나오면 제일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쓰셨던데요.
안판석
: 그 책은 <시학>에 대한 해석인데, <시학>은 참 현대적인 책이에요. 아마 제목과 저자만 가려 놓으면 지난달에 나온 것처럼 보일 거예요. “초보자들은 이야기의 구성보다 대사나 성격묘사를 더 중요시한다”거나“극의 첫 번째 요소는 플롯이고, 캐릭터는 두 번째다”라는 대목 같은 건 지금의 현실과도 어찌나 똑같은지. 캐릭터는 그 플롯을 가장 잘 운반할 수 있게끔 창조해야 한다는 거거든요. 

드라마의 재미와 윤리적인 측면은 결국 같이 간다고 생각하시나요?
안판석
: 당연히 그렇다고 봐요. 공자 왈, 맹자 왈 해야 윤리적이라는 게 아니라 드라마는 무조건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거예요. 단 하나, 그 고통과 결부되어 얻는 인생의 통찰을 다루는 거기 때문에 윤리학과는 뗄 레야 뗄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그게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참 신기하지요. 모든 인간에게는 순정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 사는 게 아닐까? 나도 좀 나아지고 싶은데 어떡하지? 내가 그렇게 했으니 죽일 놈인가?’ 같은 죄책감, 쓸쓸함, 허무함을 혼자 껴안고 살아요. 그러면서도 그걸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민망하지 않게 교묘히 탐구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하죠. 어떤 사람에겐 그게 소설이고, 누군가에겐 영화고, 또 많은 사람들에겐 드라마인 거예요. 그러니까 드라마를 본다는 건 사실 참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드라마를 통해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의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거죠.

“보는 사람은 대충 보더라도 드라마가 ‘작품’이라는 생각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안판석
: 이 직업이 엄중한 직업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드라마에서 윤리를 보여주려면 그것을 자기가 겪은 것처럼 느끼게 해야 하고, 그러려면 극적 장치가 필요해요. 이를테면 극적 개연성 같은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옆집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도 그대로 옮겨 쓰면 말이 안 돼요. 극을 쓴다는 건 현실의 시공간을 축약시켜서 현실 그대로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지적으로 조작해내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머리가 있어서 조작인지 아닌지 보면 알아요. 그 조작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게 어려운 거예요. 유사 이래 극이라는 건 우리 삶을 거울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장치로 그리스 로마 시대엔 원형극장에서, 19세기 후반에는 소극장에서, 스크린이 걸린 극장에서, 그 다음에는 집집마다 놓인 텔레비전에서, 지금은 각자의 노트북에서 이루어지거든요. 수도관이나 지하철만큼 우리 인생에서 뗄 수 없는 거고, 모든 사람이 지켜보면서 냉혹하게 비평하고 섬세하게 관리해야 해요.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하신 평생의 테마를 가지고 <밀회> 이후의 작품을 만드신다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기 때문일까요. 
안판석
: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시지프스의 신화 같아요. 시지프스가 바윗덩이를 산 정상으로 굴려 올리면 도르르 굴러 떨어져요. 그럼 또 내려가서 굴려 올리죠. 그 사이 0.00001초 정상에 오른 순간이 있는데, 모든 세계에는 누군가의 어떤 행위에 의해 0.00001초의 정점을 맛볼 수 있는 순간이 있어요. 어차피 영원히는 안 되는 일이죠. 인류의 역사에서 행복하기만 한 시간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역사책을 봐서 알고 있듯 늘 싸우고 고통과 비탄 속에 있었죠. 하지만 멈춰서 한탄만 하는 게 아니라, 안 되는 줄 알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보겠다고 하는 데 진정한 인간성이 있어요. 그리고 끝까지 돌을 굴려 올리다 보면 옆에서 같이 굴려주는 놈들이 생겨요. 그들과 함께 느끼는 연대감, 그걸 통해 맛보는 고통 속의 행복이 참 아름답고 중요한 거죠.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고, 설혹 좋은 세상은 안 온다 해도 그 짓을 끝없이 하는 거예요. 어느 놈은 기사로, 어느 놈은 드라마로, 어느 놈은 밀가루 반죽 가지고 안 되는 일을 끝까지 하는, 그게 인간성이에요. 나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돌을 굴리는 거예요. 이번에 연습 했으니까 다음엔 좀 더 잘 굴리지 않겠어요? 좀 더 오래 멈춰 있게, 그거 한 번 해 보려고. 

사진제공.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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