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마법사의 도시>, 마법으로도 열리지 않는 신세계

2013.11.14

<죽은 마법사의 도시>│작가: 팀 겟네임│매주 화요일 네이버 연재

“신세계는 이미 열렸습니다.” <죽은 마법사의 도시>의 프롤로그에서 한 연구자는 자연 어디에나 분포한 신비의 물질 마나가 발견되고, 그것을 이용한 기술인 마법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편의 마법 어플리케이션을 작동시킬 수 있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며, 택배는 아파트 현관에서 집으로 바로 텔레포트될 수 있다. 이토록 새로운 자원과 새로운 기술이 연 신세계는, 하지만 두 개의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이 번영이 수많은 마법사를 희생시킨 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포스트 산업혁명이라 해도 될 이 획기적 변화의 가장 큰 혜택들을 소수의 권력자들이 독점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진실은 인간의 탐욕이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소급한다. 그 스스로 마법의 달인인 도사 함지존의 말대로 “법과 돈, 권력 앞에 마법은 무력하다.”

<죽은 마법사의 도시>가 몰살당한 마법사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 크림슨 로브의 복수극과 그를 쫓는 형사 김현욱의 추리극, 두 개의 플롯으로 이뤄진 건 그래서다. 크림슨 로브에게 정의란 자신의 일족과 동생을 죽인 세력처럼 명백한 악을 더 큰 힘으로 쓸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공권력의 집행자인 김현욱의 생각은 다르다. 수많은 인과관계로 엮인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 안에서 우리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정의가 될지 불의가 될지는 알 수 없기에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정의, 즉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정의를 지켜야 한다.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타락을 동반한다. 그 위에 불의 심판을 내릴 것인가, 시스템의 테두리 안에서 끊임없이 보완할 것인가.


<죽은 마법사의 도시>는 이 중 김현욱의 세계로 좀 더 기울어진 듯하다. 크림슨 로브가 종종 자기 신념의 허점에 흔들리는 반면 김현욱의 윤리관은 항상 뚜렷하게 그려지고, 작품을 통틀어 가장 현인이라 할 함지존조차 현 사회를 부정하면 “사회를 유지시키는 모든 합리적인 시스템이 마비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마법의 발견처럼 혁명적인 계기가 있어도 인간 본성과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가 깔려 있다. 함지존은 어느 날 하늘에서 절대자가 내려와도 사람들은 자기 갈 길 바쁠 거라고, 김현욱은 영웅 따위 세상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지만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데뷔작 <교수인형>에서 악한 영혼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아닐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던 팀 겟네임의 세계관은 <죽은 마법사의 도시>에서 좀 더 거시적인 형태로 반복된다.

최종적으로 크림슨 로브도 김현욱도 이 모든 악행의 배후에 있는 세력과 싸우게 됐지만, 그럼에도 이 싸움은 국지전이다. 그 결과로 세상을 새롭게 재편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시스템의 지엽적인 부분을 치료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서 그 싸움이 치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크림슨 로브는 두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고, 김현욱 역시 수사 과정에서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잃을 뻔했다. 요컨대 이 작품은 혁명적 변화가 아닌 점진적 개선조차도 엄청나게 치열한 싸움과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시선은 냉소적이되 행동은 능동적이다. 이 기묘한 역설이야말로 <죽은 마법사의 도시>의 전망을 값싼 냉소주의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마법으로도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대신 선한 의지로 아득바득 노력한다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쉽진 않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만약 정말 신세계란 것이 있다면, 어느 날 갑자기 열리는 것이 아닌, 그 치열한 개선의 끝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죽은 마법사의 도시에서도, 살아 있는 인간의 도시에서도.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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