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작가 “언젠가는 1인칭 사이코패스 소설을 쓸지도 모르겠다”

2013.07.29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바이러스가 화양이라는 도시를 덮친다. 감염된 즉시 눈이 빨갛게 변하며 끝내 사망하게 되는 이 바이러스의 이름은 ‘빨간 눈’. 병은 동물과 사람을 가리지 않은 채 퍼져 나가고, 도시는 곧 봉쇄된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와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을 집필한 정유정 작가의 신작 <28>은 그 지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낸 소설이다. 유기견을 구조하는 수의사 재형과 기자인 윤주,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사이코패스가 돼 버린 동해, 간호사 수진과 119 구조대원 기준, 늑대개 링고 등 총 여섯 개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 작품은 화양에서의 28일을 통해 인간과 동물이 지닌 생명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접속사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속도감 있는 문장과 전염병이라는 미스터리를 끌고 나가는 힘은 장르소설의 그것이지만,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서늘함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깊은 애정이다. 실제로 만난 정유정 작가 역시 그의 작품과 닮아있었다. 넘치는 에너지와 주저앉지 않는 근성의 뒷면에서,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번쩍 눈을 빛내고 있었다.

* 이 기사에는 <28>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8>을 탈고한 후부터 지금까지 뭘 하면서 지냈나.
정유정
: 원고를 쓰는 동안 워낙 기진맥진해 있었던 터라 아무것도 못했다. 사실 <내 심장을 쏴라>는 열다섯 번, <7년의 밤>은 여덟 번 정도 고쳤는데 이번 작품은 다섯 번밖에 못 고쳤다. 분량은 더 짧았는데, 이상하게도 더는 못 고치겠더라. 토할 것 같았다. 아직까지 책도 펼쳐보지 않았다. 지금 보면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을까 봐 의도적 눈감기를 하고 있다. (웃음)

다른 작품에 비해서 더 힘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정유정
: 여섯 개의 시점으로 진행하다 보니 그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게 힘들었다. 작가로서 전체 이야기를 통제해야 하니까, 한 인물에만 계속 이입하고 있을 수가 없는 거지. 독자 중에서도 읽기 힘들었다는 분들이 있던데, 쓰는 입장에서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다중 시점은 한 명 한 명의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정해야 하고, 시점이 자꾸 바뀌어서 읽는 사람의 집중력도 다소 떨어질 수 있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이 방식을 선택해야만 했던 까닭이 있나.
정유정
: 전지적 작가시점은 쓰기엔 편하다. 그냥 쭉 돌아가면서 해설하듯이 쓰면 된다. 그런데 독자가 감정을 이입할 통로가 없다. 작가가 중간에 딱 버티고 있는 거다. 3인칭 다중시점을 쓰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시점의 잦은 변화 때문에 독자들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중간에 책을 덮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평상시보다 문장을 더 짧게 쓰면서 이야기도 더 빠르게 전개했다. 사람들이 끝까지 읽지 않으면 소설을 통해 내가 던지는 질문, 즉 ‘인간의 목숨이 과연 다른 동물들의 생명에 비해서 존엄하냐’라는 것이 쓸모없어지기 때문에 집중할 수 있는 나름의 장치를 마련했던 거다.

동물과 인간 모두 감염되는 ‘빨간 눈’이라는 전염병이 주요 모티븐데, 의외로 병 자체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이것 역시 주제를 좀 더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었나.
정유정
: 사람들의 이야기에 중점을 둬야 할 것 같아서 전염병에 대한 내용은 최소화했다. 서울대 수의학과 우희종 교수님께 여쭤보니, 병이 번지고 도시가 봉쇄되는 상황에서 28일 만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하더라. 짧은 시간 안에 역학 조사관이 파견돼서 숙주를 발견하고, 진단 키트를 만든 후 백신을 개발하는 이런 건 정말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인 거지. 이런 말을 듣고 나니 병에 대한 내용은 아무것도 밝히지 않고 끝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병이고, 전염확률은 얼마나 되며, 어떤 방식으로 전염되는지 등을 독자들이 크게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 인간들과 개들이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작품을 끌고 가는 여섯 개의 시점 중 하나가 ‘링고’라는 늑대개다. 동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정유정
: 개한테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입을 열어주고 싶었다. 사실 구제역이 돌았을 때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영상을 보고 <28>을 쓰기 시작한 건데, 동물들도 인간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함부로 죽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물론 링고의 시점에서 글을 쓰는 건 어려운 과정이었다. 다른 인물의 시점보다 분량이 짧은데도 시간은 두 배가 걸렸다. 개가 화났을 땐 어떻게 행동하는지, 구애를 할 땐 어떻게 하는지 등을 다 생각하면서 써야 하니까 쉽지 않았다. 개 심리학 책, 행동학 책을 갖다놓고 필요한 부분들을 다 기록했다. 그래도 끝까지 ‘내가 이걸 제대로 쓴 건가’라는 의문만큼은 풀리지 않더라. 지금은 의외로 링고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아, 내가 제대로 썼나 보다’고 생각 중이다. (웃음)

심지어 링고는 스타라는 개와의 멜로도 있다. (웃음) 스타에게 첫눈에 반하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지내다가 스타가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복수심을 불태운다는 것 자체가 작품을 움직이는 주요 플롯 중 하나인데.
정유정
: 동물이라서 더욱 설득력이 있었던 부분이다. 사람한테 이런 설정을 입혔다면 아마 ‘70년대 영화 찍냐’라는 말을 들었겠지. 본능을 따라 사랑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좋으면 그걸로 끝이지, 사람처럼 하나하나 따지지 않으니까 묘사하는 입장에서도 수월했다. 알고 보면 링고는 ‘상남자’ 캐릭터다. 이 지구 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남자인데, 늑대개를 통해 구현한 거다. 로망의 실현이랄까. (웃음)

하지만 결국 링고도 죽고, 분노로 날뛰던 그를 진정시키려 했던 재형도 죽는다. 주요 등장인물 여섯 명 중 살아남는 것은 아내와 딸을 개에게 잃은 소방대원 기준과 기자인 윤주뿐이다. 마지막에 누구를 살려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정유정
: 초고에서는 윤주 한 명만 살고 모두 죽게 돼 있었다. 그런데 수정하면서 기준까지 살려놓은 거다. 기자인 윤주는 기록자로, 역사를 은유하는 인물이다. 역사가 있다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전할 사람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기준인 거다. 하지만 재형은 처음부터 죽어야만 했던 캐릭터다. 안타깝지만 죽을 팔자였던 거지. 동물에게 빚을 지고, 그 죄책감을 안은 채 살아가던 그가 결국 링고 때문에 죽음으로써 동물과 사람의 공존, 그리고 공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

기준과 윤주, 재형 등이 완벽하게 선악으로 나눌 수 없는 인물이었던 반면, 개들을 죽이며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박동해는 괴물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전작 <7년의 밤>에서도 오영제라는 사이코패스 캐릭터가 등장한 바 있는데, 이런 인물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편인 건가.
정유정
: 진짜 악인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더라. 그런 사람들이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라는 궁금증이 많다. 그래서 사이코패스들은 어떤 데 관심을 두는지, 감정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감정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지 등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다. 내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우도 많고. 사실 어느 인간이든 마음속에 지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어떤 때 발현되고 심화되는지, 악마나 괴물로 진화하는 건 어떤 경우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소설이 아닐까 싶다. 내 작품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앞으로도 내 소설에서 달달한 이야기는 안 나오지 않을까. (웃음) 언젠가는 1인칭 사이코패스 소설을 쓸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까지 관심을 갖게 되는 것 아닐까.
정유정
: 사람을 참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많이 한 후 늦게 등단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삶에 대한 시각이 조금 더 열려있는 것 같긴 하다. 상상력에도 제약을 덜 받는 것 같고.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아 등단할 때까지 공모전에 11번 떨어졌다고 들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나.
정유정
: 이 악물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원래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 아닌데, 자꾸만 떨어지니까 정말 말도 못하게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승부를 보겠다는 마음이었다. 등단을 위해서 모든 걸 버리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니, 죽으나 사나 끝을 봐야 하는 거다. 이대로 포기해버리면 나는 잉여가 되는 거니까. (웃음) 성격 자체가 뭐든 끝까지 해야 하는 게 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항상 ‘쓸데없는 데 목숨 걸지 말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웃음)

그렇게 힘들게 등단했는데, 들어오는 원고청탁을 전부 거절하고 다음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고 하더라. 이미 작가가 된 것이니 그 길만 잘 따라가도 됐을 텐데, 또다시 안 될지도 모르는 공모전에 매달린 이유는 뭔가.
정유정
: 처음에 청소년문학상을 받고 등단했을 땐 정말 다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성인소설도 쓰고, 청소년소설도 쓰고 싶었지만 청탁은 계속 청소년소설만 들어왔다. 성인소설을 발표할 지면이 없는 거지. 나도 쓸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기 때문에 <내 심장을 쏴라>로 세계문학상에 다시 도전했다. 다행히 수상을 한 덕분에 일단은 어느 구석자리라도 서 있을 곳이 생겼다. 그때 비로소 <7년의 밤>을 쓸 수 있었다.

<7년의 밤> 같은 경우 약 30만 부가 팔렸고, <28>은 현재 댄 브라운,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작품들과 함께 많은 독자의 관심을 받고 있다. 본인이 쓴 소설에 사람들이 왜 매력을 느끼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정유정
: 아무래도 이야기성이 강해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어젯밤 꾼 꿈도 스토리로 이해하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령 느닷없이 호랑이가 출현하고, 아무 연관 없이 이층집이 등장하면 개꿈이라고 인지하는 거다. 그게 연결돼서 나와야 꿈에 의미를 부여한다.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게 인간인 거지. 다른 작가들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소설이 이야기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늘 독서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고 마음먹고 쓴다.


 

그렇다면 좋은 소재에 대한 갈증도 항상 있겠다.
정유정
: 소재는 어디서 찾는 게 아니라 어느 날 우연처럼 온다. <28>도 구제역 동영상을 보고 썼듯이, <7년의 밤>은 차에 치인 소녀를 공기총으로 쏴서 죽였다는 뉴스를 보고 쓴 것이었다. 어떤 뉴스를 봤을 때, 질문을 하면서 상상하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노트에 끼적거린다. 그게 커지면서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서 이게 세상에 내놓을만한 이야기인가, 사소한 건 아닌가, 혹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일까 스스로 물어본다. ‘그런 것 같다’라는 결론이 나면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는 거다.

우연이라고 표현했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정유정
: 워낙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블로그나 트위터처럼 관심 없는 건 아예 안 해도,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만큼은 끝내 뭔지 알아봐야 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어릴 때도 사고가 잦았다. 저기 땅벌집이 있으니 손대지 말라고 하면, 기어이 그걸 파서 보다가 땅벌한테 얼굴을 스무 방씩 쏘이는 식이었다. 호기심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짓들을 많이 했다. (웃음)

장르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여러 번 읽히게끔 하는 방법, 즉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클 것 같다. 형식상의 실험을 계속 해나갈 생각인가.
정유정
: 항상 다음 소설에 과제를 부여하는 편이다. <7년의 밤>은 단일 플롯으로 썼지만, <28>은 서브 플롯 여러 개를 메인 플롯 하나로 엮는 구조적인 실험을 한 거다. 이게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지만 다음에도 새로운 걸 시도해볼 것 같다. 내 자신이 완성된 작가가 아니라 조금씩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다음 글에서는 지금까지 익히지 못했던 것들을 익혀보자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 부분들로 인해 독자들이 즐거울 수 있으면 더 좋겠고.

장르소설을 쓰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문학성’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아왔고,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고 들었다. 지금은 거기서 좀 자유로워진 것 같나.
정유정
: 이제는 그 부분에 대해서 맷집이 생겼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게 됐다. 내가 잘하면 되는 거니까. 경력이 쌓이면서 적당한 말들을 걸러 듣는 노하우도 조금씩 느는 것 같다. 물론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상처를 많이 받는 성격이다. 로봇이 아니니까 당연한 거지. (웃음) 하지만 그 상처 때문에 고꾸라지지는 않는다.

혹시 다음 작품을 위해서 새롭게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정유정
: 관심이라기보다는 책을 많이 읽고 있는 건 뇌 과학 쪽이다. 왜 보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계속 보고 있다. (웃음) 사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요즘에는 어디 관심을 가질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9월에 <제리>를 쓴 김혜나 작가와 함께 히말라야로 여행을 갈 생각이다. 안나푸르나 아랫길을 따라 한 달 정도 트래킹을 하려고 한다. 머릿속이 너무 어지러워서 세상으로부터 좀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다. (웃음)

그래도 이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을 때 무조건 신뢰하고 봐주는 독자들이 많이 생겼다. 자신을 좀 믿어도 되겠다 싶나.
정유정
: 그건 영원히 안 생길 것 같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강할 뿐, 내 자신을 믿지는 않는다. 이게 무슨 겸손의 차원이 아니라 진짜 그렇다. 내가 소설가라는 사실도 실감이 잘 안 난다. 이렇게 나와서 인터뷰도 하고 이럴 땐 ‘아, 내가 지금 책을 내고 홍보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다가 집에 가면 전혀 실감을 못한다. 특히나 소설을 쓸 때는 이게 정말 끝을 볼 수 있을까, 완성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질 겨를이 없다. 이것 때문에 항상 불안하다. 그래서 소설을 쓰다 보면 굉장히 힘이 빠지고 외로울 때가 있다. 혼자 골방에서 하는 싸움이니까. 앞으로는 그럴 때 내 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었다는 경험을 떠올리려고 한다. 굉장히 큰 힘이 될 것 같다.

장소 협조. page A



목록

SPECIAL

image 공효진

최신댓글